- 무위사에서 구례까지, 2017 겨울
템플 팀장은 나와 얘기하는 것을 무척 신나 했다. 함께 2박 3일 일정을 소화하는 중학생들 3명은 우리 뒤에 쫄쫄 따라오고 우리는 앞서 가면서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고 2인 큰아이가 중 3일 때까지 살림하며 아이들만 키웠는데 주말 부부가 소원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붙박이 직장이라 영 불가능한 소원인가 했었다고. 그런데 이곳에 템플 스테이 하러 왔다가 너무 좋아서 가끔 봉사 활동을 하러 왔었다고. 그러다가 스님이 잘 보셨는지 근무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서, 웬 떡이냐 하고 덜컥 잡았단다. 살림과 아이들은 남편에게 모두 맡기고 이 절에 지내면서 드디어 주말부부가 되었다고.
템플스테이 일정에 따라 산책하고 요가 가르치고 차 마시고 등산하고, 좋아하는 것들만 하고 있으니 이렇게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느냐고. 남편이 번 돈은 일체 다 알아서 하도록 맡겨버리고 자기 급여는 혼자서, 가끔은 딸하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하며 자유로이 쓰는데, 여행 말고는 쓸데도 없어서 딸의 여행을 지원하기도 한단다.
절에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면 방송 인터뷰도 하고 해서 첨엔 뜨악했던 남편도 이제는 적극 격려해준다고. 정년도 없는 일이라 오래도록 할 것이며, 템플 스테이 규모도 확장시키고 대학원 공부도 해서 이 분야에서 좀 더 잘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도 더 주고 인정도 받고 싶단다. 나보다 딱 10년은 젊은 나이인 것 같은데 첨 봤을 때 아가씨인 줄 알았다. 수려하고 야무진 용모의, 산사에 잘 어울리는 아가씨.
둘째 날 오후 일정이 모두 끝난 휴식 시간에 팀장이 산책을 제안해서 또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선생님이라고 했더니, “미술 선생님?” 내가 영어 선생님이라고 했더니 “와!” 여기 대흥사는 대규모 행사도 많고 그때마다 외국인들도 많이 오는데 통역 봉사 같은 거 하면 좋겠다고. 나중에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 같은 것을 업으로 해도 좋겠다고 했다.
귀가 쨍하고 열렸다. 통역 봉사라!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또 이어질 수 있나 보다. 이 사람을 만나러 내가 여기 온 것이구나 싶었다. 내 얼굴에 난 상처가 그냥 난 게 아니었던 거야.
다음 날 아침, 휴대폰으로 재난 문자를 받았다. 강원 경기 지방에 폭설 주의보, 거친 풍랑으로 정박 중인 선박들 조심하고 출항하지 마라고 했다. 아침 일찍 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목요일인데 월요일까지 계속 눈이 온다고, 있는 곳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다가 눈 다 녹으면 움직이라고.
방문을 열어보니 눈이 하얗게 쌓여있고 바람이 거세다. 지금까지는 여기가 너무 좋았는데, 눈 때문에 발이 묶인 채로 이 이상 여기 머물 수는 없다고 혼자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