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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Feb 05. 2023

나의 죽음도 이랬으면

 - 영화, Dick Johnson is Dead

  

  딕 존슨은 86세의 정신과 의사이고 그의 딸 커스틴 존슨은 영화감독이다. 딸은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세상을 떠난 엄마처럼, 아버지에게도 그런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감지하고 그 죽음의 과정을 영화에 담기로 한다. 딸을 깊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 제안에 기꺼이 동의하고 그 과정이 힘들어도 열심히 즐겁게 촬영에 임한다.  


  커스틴은 아버지가 죽게 되는 여러 가지 가상의 장면들을 설정한다. 아버지는 길을 걷다가 건물 위에서 떨어진 물체에 맞아 죽기도 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고꾸라져 죽기도 한다. 공사 현장에서 철기둥을 운반하던 인부가 갑자기 방향을 트는 바람에 어이없이 그 철기둥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기도 한다.









   딸은 아버지의 이런 사고사 장면들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은 후에 이르게 될 천국의 모습과 가상의 장례식, 그리고 이런 가상의 장면들 외에 아버지의 실제 일상도 함께 영화에 담는다. 가상의 죽음과 현실, 판타지가 뒤섞이고 현실의 시점도 순서가 뒤섞여서 매번 가상이 실제인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도 한다. 


  초반에 영화를 보면서 감독은 왜 이런 영화를 찍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오랫동안 영화를 찍으면서도 정작 엄마를 기록한 것은 하나뿐이었는데 그것도 알츠하이머에 걸린 후, 그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모두 잃었을 때의 짤막한 영상이었더란다. 그것이 이 영화를 찍게 된 출발점이었다고 그녀는 영화 초반에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왜 하필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을까?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여러 가지 형태로 죽게 하고 죽기 전 장례식과 사후의 천국에 대한 소망까지 연기하며 때로는 세트장과 현실의 공간까지 뒤섞는 것이  아버지의 기억과 감정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왜 아버지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딕 존슨은 그 촬영에 순순한 모습으로 참여하면서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기억을 잃어가는 스스로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딸에 대한 사랑과 커지는 의존, 복잡한 감정들에 복받쳐 그는 아이처럼 울기도 한다. 커스틴 존슨 또한 영화를 찍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감정들에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아버지와 함께 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영화를 찍는 동안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과 즐거움, 예기치 못한 감동의 순간들도 경험한다.


   영화의 초반부에 가졌던 나의 의구심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례식 장면에서 스르르 풀리며 하나씩 아귀가 맞게 되었다. 

  추도사를 하는 한 지인은 딕 존슨이 누구보다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정성으로 환자를 도왔다는 것,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기억을 잃은 행동을 하게 되는 놀랍고 가슴 아픈 순간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한다.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떠오르며 그 추도사에 깊이 감정이입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존슨의 친구가 추도사를 하는데 그는 끓어오르는 슬픔에 말문을 잇지 못하고 꺽꺽 운다. 추도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는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존슨이 살아있다는 것, 이것은 영화 촬영을 위한 가상의 설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장례식에 몰입된다.


  존슨은 친구가 우는 광경을 딸과 함께 문틈으로 지켜보며 저 친구는 이 장례식이 가짜라는 걸 모르는 거 아니냐며 웃다가 결국 자기도 따라 울고 만다. 그는 그렇게 자기 장례식을 바라보며, 자기가 죽었을 때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와서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는 것이다. 친한 친구가 그렇게 슬퍼하며 오열하리라는 것도.











   죽음은 죽는 순간부터 영원한 암전 같은 것이다. 자신의 사후에 어떤 일이 있을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자기의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어떻게 묻힐지 알지 못한다. 다만 전에 보아왔던 다른 사람들의 장례식에 비추어 자기의 장례식도 그러리라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러나 본인이 실제로 보고 느끼는 이 장례식은 참으로 가슴 벅차다. 가상이라 해도 자기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그 벅찬 감동을 간직하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이 영화를 되짚어보며 나는 딕 존슨의 죽음이 너무 부럽다. 대부분의 노쇠로 인한 죽음은 곁에 지켜주는 가족이 있다 해도 각자의 삶에 바빠 최소한의 돌봄 정도밖에는 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병이 깊어질수록 소외된 채 외롭게 죽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딕 존슨의 경우는 사랑하는 딸은 물론 친지들, 그 영화의 스텝들까지 그가 죽음으로 향해가는 그 모든 순간을 숨죽이며 바라보고 느끼고 반응한다. 영화 속에서 죽었다가 현실에서 다시 살아나며 살아있는 순간의 소중함에 감사할 뿐 아니라, 숨이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내내 주인공인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죽은 후에도 영화로 남게 되고 그 추억과 성과를 딸과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이들과 나눌 수 있다니 이보다 멋진 죽음이 또 있을까?   





  다시 ‘커스틴 존슨은 왜 이 영화를 이런 특이한 방식으로 찍었을까?’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얻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관객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그녀는 아버지가 엄마의 죽음을 통해 보았던 것처럼, 기억을 잃어가는 자기의 죽음 또한 그렇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 가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런 두려움 속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죽음은 이 영화 속 가상의 죽음들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어이없이 올 수도 있다는 것, 영화 속에서 죽을 때마다 매번 다시 살아나 허허 웃어넘겼던 것처럼 별 거 아닐 수 있다는 것, 죽어서 가게 될 천국에서는 평생의 부끄러움이었던 뭉개진 듯 굽은 발가락들도 펴지고 그리운 아내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러니 죽음을 너무 무겁고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지 말기를, 좀 더 가볍고 희망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가까이 두고, 그것을 통해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늘 일깨우면서 살아가기를, 그래서 실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도 두려워하지 말고 웃음을 잃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맞게 될 나의 죽음이 어떤 형태이든 그 죽음을 대하는 나의 마음도 이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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