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서랍을 꺼내며
가을 숲 속에서 연기처럼 번져오는 안개로 아침은 자욱했다.
안개의 터널을 뚫고 지나온 길에는 가라앉은 낙엽색들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습기를 머금은 낙엽의 빛깔은 서리 내린 이른 아침의 입김처럼 따사해 보였다.
카페 관동의 2층 상담실에서 능내역 저 그림이 날아왔다.
나무틀에, 가을의 질감을 업고서 저렇게 앤틱한 분위기로 감기는 녀석이라니..
섬세한 터치에 감탄하고, 가을이 쏟아져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고파오는 그림이다.
가을엽서네....
오늘, 저 기차가 바라보이는 능내역 간이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싶네.
"고마워요!!! 사비나"
스무 살이 넘은 어느 가을이었지.
늦도록 아버지를 졸라 겨우 혼자의 여행을 허락받았었다.
문제는 <돈>이었는데 아버지는 돈이 없다는 핑계로 돈을 주진 않았다.
박박 우겨서 백이십만 원이 넘는 돈을 타냈다.
이웃집에서 빌려 왔는지 어쩐지는 기억에 없다.
80년대였으니 대단한 돈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때나 지금이니 돈에 관한 개념이 없었고 내 입에서 말이 떨어지면 나오는 것으로만 알았다.
여행 목적지는 경주였는데 밤 기차를 타려고 작정한 곳은 금곡역이었다.
경춘선의 금곡역을 가면 경주로 가는 줄 알았다.
동생은 버스역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정거장에서 내려 금곡역을 향해 걷는다고 걷는 곳이 반대 방향인
평내. 호평 방향이었다.
택시를 타고 마석으로 갔다.
밤은 이울었고 깜깜한 낯선 동네에서 밤기차를 타는 일은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가까운 여관을 부탁했다.
새벽기차를 탈 요령이었는데 냄새나는 여관 이불을 덮고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여관엔 밤새 드나드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여행이란 것은 이렇게 낯선 곳에서 혼자 떨면서 잠을 자야 한다는 걸
알지도, 생각도 못했다.
날이 새면 경주 여행이고 뭐고, 곧장 집으로 가겠다고 악몽을 꾸듯
결심했다.
새벽 출근을 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마석에서 호평동으로 넘어오는 마치고개를
넘는데, 안개에 덮인 숲 사이로 처연하게 빛나는 단풍들이라니...
돈을 벌어보지 못한 나는 출근을 한다는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출근객들에 녹아들어 가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에 달콤한 평화의 기운이 코끝을 감쌌다.
금곡역은 경춘선의 노선에 놓인 역이다.
능내역은 중앙선 노선이다.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이것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부모가 되면 자식들이 원하는 돈을 샘물 퍼내듯 퍼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부모는 우리들을 학교 보내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을 것인데
맏딸이라는 작자가 이런 현실성이 없었다.
아침 이슬을 신고 들어온 나는 안개처럼 소리 없이 내 방에 들어가
못 잔 잠을 늘어지게 잤었다.
며칠 후, 내 친구가 찾아오자 아버지는 <돈>을 달라고 했다.
친구와 여행을 떠난다고 나설까 걱정이 드셨던 거다.
책상 밑, 여행 가방에 넣어 놓은 뭉텅이 <돈>을 아버지께 드렸다.
친구는
"친구 집에 많이 가봤지만 너네 아버지처럼 다정한 사람은 처음이다"했다.
친구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었다.
근엄하셨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같은 줄로만 알고 살았다.
<능내역의 기차> 그림을 받고
그때가 생각났다.
결국 떠나보지 못한 기차로의 경주 여행.
그땐 경주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불렀을까!
아직도 하늘은 잿빛이다.
그날...
내 여행 가방엔 송수권 시인의 시집이 들어있었다.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시집은 '山門에 기대어'였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비애가
스민 이 詩가 나는 내도록 좋았다.
어느 여관에서 갱지에 끄적여서 <문학사상>에 보낸 시였다.
결국 갱지는 쓰레기통 행이였다.
그 시절 <문학사상>의 주간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쓰레기통에서
이 갱지를 끄집에 내지 않았다면 <송수권>시인의 삶은 어땠을까!
쓰레기 통에서 발굴되 시인은 80년대에 광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시인이 세상에 없듯, 내게도 저 '시집'은 없다.
마음이 허망하면 빈 기차역을 떠올리며 어둠 속을 달리던 객차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