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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쿠아마린 Nov 04. 2021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요조는 어떻게 파멸해 갔나!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상인에 대한 증오보다는 처음 발견했을 때 큰기침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저한테 알리러 다시 옥상으로 돌아온 호리키에 대한 증오와 노여움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괴로워했습니다.>


식사 중이었다. <요조>가 그림자처럼 내게 스미더니 저 장면으로 내 목을 메이게 한다. 일순 분노가 일어난다. 경박하고 가식적인 인간, 호리키를 믿었단 말인가! 호리키와 낄낄대며 옥상에서 술을 마시던 <요조>는, 호리키 손에 이끌려 내려와 자신의 아내가 능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지만 ‘계단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백대로 ‘부끄럼 많은 생애’와 ‘죄 많은 인생’을 살았다. 참회의 고백이라 해도 그의 인생에 면죄부나 동정을 주고 싶지는 않다. 일본 패망의 허무를 온몸으로 휘감아 퇴폐와 자아의 상실과 고뇌를 말하고 싶었을까? 인간 실존의 무거움은 전쟁이나 패망이나, 어지러운 현재에도 지치지 않고 계속된다.



<인간실격>

나는 이 드라마에 빠져있었다. 빠져있다고 하기에는 성의가 부족하니 생각나면 본다고 해야 옳다. 성의가 부족하니 전후 스토리를 모른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도 알 수가 없다. 종영을 앞두고야 겨우, 방영되는 요일과 시간을 확실히 뇌리에 담아두었을 정도다.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함을 무릅쓰고 앉아서 <인간실격>을 기다렸다. 강재와 부정은 어디론가 떠나고, 다른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일요일 밤이었다. <부정>과 <강재>가 어떻게 만났으며, <부정>네 부부사이가 왜 그리 멀어 보이는지 나로선 짐작도 안 갔다. 그냥 봤다. 엔딩에 흐르는 노래가 좋고, 어느 별에서 왔나 싶을 만치 공허한 전도현, 류준열의 연기가 미뻤을 뿐이다. 그들의 빈들같은 눈빛과, 욕망없는 낯빛이 대지를 막 감싸기 시작한 냉기와 잘 어울려서 좋았다. 여배우 역을 맡은 여자의 독한 눈빛이 왜 ‘부정’에게 꽃이는지 알지 못하지만 넋을 잃고 본다. 꼼짝않고 그들을 쫓는다, 화면이 흑백으로 전환되고, 그 위로 츱츱한 엔딩노래가 가을날의 비처럼 흩뿌려지면 밤은 깊고 깊어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끝이 났을까.


어쩌다, 백 년 만에 서점을 갔다. 그것도 큰맘을 먹고서다. 책 사이를 걷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매대에 놓여있다. 고백하자면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인간실격>이, 소설<인간실격>을 각색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1948년에 발간된 다자이 오사무의소설 <인간실격>이 새삼스레 눈에 잘 띄는 매대를 차지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결론은 상술이었다. 밉지 않은 상술. 덕분에 나 같은 어리바리한 사람이 걸려들었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어리석다. 이런 어리석음이라면 천 번도 만 번도 그 속에 몸을 담그고 싶다. 그만큼 서점에 갈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간실격>은 <데미안>과 더불어 꾸준히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을 수놓고 있다고 한다. 20년 동안 독서를 안 했던 티를 출판사의 '상술'로 간주해버린 나의 우매가 가소롭다.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 작품을 발표한 후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동반자살을 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자전적인 요소가 다분한 이 작품을 그는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완성하지 않았을까! 


<인간실격>은 액자소설 형식이다. 화자가 어느 사내의 사진 3장을 보고 느낀 소회를 술회하며, 요조의 수기 3편이 소개된다. 3장의 사진은 3편의 수기가 쓰인 연대에 해당된다. 즉 어린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이후의 시기다. 화자는 가족사진 속, 한 남자아이의 웃는 열굴에서 섬뜩하고, 괴상한 느낌을 받는다. 추하고 욕지기가 나올 만큼 아이의 표정이 작위적이다. 온 얼굴에 원숭이처럼 주름을 잔뜩 잡고 웃고 있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익살로 일그러진 웃음. 요조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감추며 가면 속에서 살아가는 게 편했다.

풍족한 집안의 아이 <요조>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인간의 실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서글픔을 느낀다. 


앞과 뒤에서 다른 말을 하는 어른들, 하녀와 머슴들에게 당한 성폭행, 생각을 알 수 없는 가족들. 요조는 인간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인간은 모두 ‘가만히 있다가 꼬리를 쳐서 등에“를 잡는 소꼬리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순간 자신을 공격할지 가늠이 안되는 소꼬리가 모든 인간이라면 자신은 ’등에”일 뿐인 것이다. 자신의 공포와 자신의 내면을 감추는 길은 ‘익살’을 부리는 일이었다. 인간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면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진다. 요조가 선택한 방법은 익살이었다. 자신의 생을 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어린 영혼이 안쓰럽고 대견하다. 이 섬세한고 예민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가시덤불이다.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추고 눈치를 보며 비척대던 우리집 강아지가 생각나는 ‘요조’여서, 어린시절의 우리집 마당이 자꾸 떠올랐다.


<저는 하녀와 마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 어머니조차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조는 중학교에서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는 다케이시 앞에서 공포를 느끼지만 ‘정다운 미소’로 다가가 그를 친구로 삼는다. 아니 삼아야만 했다. 자신이 진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아이란 게 탄로 나면 안 되니까. 요조는 꼭꼭 눌러 감춘 자신의 정체를 그림으로 표현한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요조’의 음산한 자화상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다케이시만 볼 수 있다. 억눌린 자신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고도 요조는 불안하다.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음산함이 누군에겐가 간파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림은 이불장 깊숙한 곳에 숨겨 버렸다. 그는 평생 가면 속에서 살아야 할 운명인가. 그렇기에 그의 페르소나는 고독하고, 뭍 여인들로부터 연민을 자아내게 하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갈피는 못 잡는 익살꾼 호리키를 만난 곳은 요조가 학교를 빼먹고 드나들던 화방이었다. 익살꾼의 비참함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익살꾼으로 살아가는 호리키는 요조와 닮은 듯, 다른 사람이었다. 호리키를 따라 방탕한 생활에 젖고, 좌익운동을 하며 퇴폐적인 생활에 젖어 있을 때, 그는 술집여자 '쓰네코'와 잠을 잤다. 술과 담배와 여자는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해주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쓰네코의 품은 그에게 행복감을 주었고, 해방감을 선물했다. 쓰네코의 사기꾼 남편은 구속되어 있다. 그런 그녀는 생활에 지쳐 <죽음>을 이야기한다. 동반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녀만 죽었다. 


자살 방관자가 되어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요조에게 많은 여자들이 보호자가 되었고, 그는 그녀들에게서 기생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유리되어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요조의 운명에 그와는 정반대로 인간을 맹목적으로 ’<뢰>하는 '요시코'와의 만남이 있었다. 건실한 생활인이 되어가는 요조는 만화를 그리며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 희망이 생겼다. 자신이 인간다운 존재가 되어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인간을 향한 아내 요시코의 <신뢰>가 자신의 그림을 받으러 온 화상에게 <능욕>으로 무너졌을 때, 그는 묻는다.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 하고.


요조는 세상과 인간을 한없이 신뢰하는 아내가 눈 앞에서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다. 스물일곱의 그는 그 밤에 머리가 하얗게 셌다.

자살을 기도하고. 모르핀을 먹으며 스스로 <인간실격>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에도 다케이시의 예언은 운명처럼 따라붙어 ‘여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인간의 공포 때문에 평생 자신을 감추고 가면 속에서 떨던 요조와, 인간에 대한 끝없는 믿음과 신뢰 속에서 세상을 살았던 그의 아내 요시코의 불행은, 다자이 오사무가 말하고 싶었던 사회 질서의 허위성과 잔혹성을 보여준다. 자신을 ‘소꼬리’ 앞의 ‘등에’로 여겼던 요조가 ‘소꼬리’의 무장해제를 위해 내세운 페르소나는 어떻게든 세상과 화합하고픈 그의 열망이었고, 노력이었다. 


얼굴에 잔뜩 주름을 잡고 세상을 향해 괴기하게 웃는 요조의 억지 웃음에 나를 투사해 보았다. 요조는 일면 나이며, 우리이며, 세상을 향한 가면을 하나씩 쓰고 있는 현대인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요조’는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아버지의 존재.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억압이 되는 두려운 존재가 아버지다. 아버지는 끝없이 펼쳐진 세상과 다르지 않다. 요조는 이들이 주는 공포를 마주하지 못하고, 극복하려는 의지없이 가면 속에 숨어서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애착관계과 형성되었더라면 그의 두려움과 불안은 소멸되었을까? 그의 성장과정이 속상했고, 아쉬웠다. 


<인간실격>.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하자, 요조는 자신을 그렇게 단정지었다.

세상에 주눅들고, 공포에 시달리며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터놓지 못한 요조가 그리워한 곳은 고향이다. 그가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대신 택한 곳은 마음의 평안을 주는 여자들 품이었다. 여자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그가 진실로 다다르고 싶었던 안식처는 고향과 자신을 향해 한없는 자애를 베풀어 줄 가족이지 않았을까! 추방당한 고향으로 이르는 길은 끝내 그에게 오지 않았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나약한 요조는 평생을 마음의 빈곤과 공허에 시달리며, 잃어버린 낙원에로의 회귀를 꿈꾸며 살았지만 결국 다다른 곳은 자신의 파멸과 <자기부정>이다. 요조의 패배한 모습에는 꿈을 행해 날다가 날개를 접은 현대인들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그들도, 우리도, 나도, 서글픈 가면 속에 정체를 감추고 세상이란 무대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다. 세상 밖으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의 삶이란 게 어찌 이리 부조리할까. 우리는 모두 <요조>다.


드라마<인간실격>은 막을 내렸다. 몰락한 ‘요조’의 ‘불길한’ 냄새가 풍기는 얼굴표정과, '무엇‘이 되지 못해 슬픈 부정과, 강재의 무채색 표정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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