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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앤 Dec 14. 2023

인생을 낭비하는 것에 대하여..

Lesson 1 in Taipei

타이베이에 온 지 5개월이 가까워지고 있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누구나 저마다의 계획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 경우에는 쓰고 싶었던 몇 편의 연구 논문이 있었고,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던 책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쓰고 싶었던 책이 있었고.. 심지어 삶을 기록해 보고 싶어서 브런치 작가에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나의 청운의 꿈은 타이베이에서 구한 집에 이삿짐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타이베이의 열기와 습기로 인해 하루종일 흘러내리던 땀을 타고 어딘가로 씻겨져 내려간 것 같다.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던 국제 이삿짐

익숙하지 않은 살림..을 시작하며 또 다른 과로가 발생했는데, 그래봤자 밥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 정리하는 정도의…일상이라서.. 매일 새로운 레시피를 찾아보고 마트에 가서 비슷한 재료를 사는 고군분투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고기가 제일 어려웠는데.. 돼지, 닭, 소 정도의 종류 구분만 가능하고.. 어느 부위인지 몰라서 그냥 그중 가장 비싼 걸 사서 요리했다. 비싸면 다 맛있겠지 머…;;(요알못의 무식한 발언을 부디 용서하시길..)

집 근처 까르푸의 고기 코너의 일부

고군분투

1. 따로 떨어져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군사가 많은 수의 적군과 용감하게 잘 싸움.

2. 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잘해 나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내 경우에는 1번의 의미가 아닐까 싶은데… 사실 용감했기에 패배하지 않았고.. 가족들 모두 목숨을 부지하며 잘 살고 있었다.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이곳의 날씨…내가 도착한 7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미친 듯 덥고 습했다.


어느 무척 더운 날 더위를 식혀 준 스무시 망고 빙수. 한국 돈으로만 원쯤.

나는 접촉성 피부염이 있는데 이곳의 더위와 습함이 이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악화시켰고, 동네 피부과 약은 듣지도 않아서.. 결국 종합병원 피부과 교수님이 처방해 주신 독한 약과 독한? 연고로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큰 병원에 가기 전까지 가려움 때문에 밤에는 잠을 자지 못 했고, 온몸을 긁다 보니 옷이며 침구며 핏자국으로 남아나지 않는 것은 물론.. 피부에 진한 멍까지 들어서 나는 패잔병이 되었다. 고군분투했지만 날씨에 패배한 거다. 문제는 약을 먹어서 그런지 하루종일 잠이 왔고 그러다 보니 무기력했다.


집 근처 병원. 의사들은 모두 영어를 나보다 잘하고 친절하다. 가장 놀라운 건 환자를 20-30분 가량 본다는 것이다. 한국에 살면서 5분컷 당하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놀라운 일.


그래서… 인생을 낭비하게 된 거다.


계획했던 것들은 순차적으로 뒤로 밀리고, 오늘의 생존과 내일의 생존을 위해 애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았고.. 나는 자책감에 휩싸였다.


이렇게 인생을 낭비해도 되는 걸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인생을 낭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끝도 없었던 방종의 시기였던 대학교 때가 그랬고, 그 전후에도 종종 비생산적인 시간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고민을 했었던가..?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가? 낭비라고 생각조차 안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초조하고 죄스럽고 한심한 것인가.

나의 결론은 이렇다.

이렇게 대책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을 하게 만드는 아이러니… 아이와 온종일 시간을 보내며 아이의 웃음을 보고 남은 인생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본다. 과거의 방종의 시간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이 지금의 온전한 낭비의 시간이 다시 미래의 나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사실은 이제는 더 이상 굳이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https://youtu.be/FXfyvQl2bD0?si=wqLQtrn02e60Obxl

김성호, 회상

지금의 내 모습을 먼 훗날 추억할 때, ‘보고픈 마음은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 장 남지 않게 되길’ 바라며 나의 기록들은 온전한 사진으로 브런치에 남겨 보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은 타이베이의 기온이 20도 밑으로 내려가면서(오늘은 12월, 29도다.. 지구야.. 아프지 마..) 중국어학원도 등록해서 다니기 시작하고, 오랫동안 미뤄뒀던 영어학습도 시작하고 어딘가 방치했던 연구논문을 꺼내기 시작하며 가능해졌다. 온화하고 청명한 날씨가 타이베이의 매력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이제 인생을 낭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진 나는 다시 한 발 한 발 세상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加油!


사이토 다카시, 내가 공부하는 이유. 대만에 오기 전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는 선생님께서 주신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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