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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달링 Oct 05. 2020

나를 성장시킨 새벽  4시

헛되지 않은 시간들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프로젝트를 맡게 된 때의 일이다.

아직 새내기 디자이너였던 나는 실험적인 디자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동안의 갈고닦은 나의 포토샵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 싶었는지 온갖 현란한 효과들을 정신없이 써 됐고 정갈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 내 첫 디자인은 그렇게 아주 엉망이었다.



처음 들어간 회사는 작은 에이전시였는데 디자이너 사수는 없었고 프로그래머만 2명이었다.

한 명은 아주 소심하고 세상 짠돌이며 그 성격에 딱 맞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분이었고

다른 한 명은 덩치도 크고 그에 걸맞은 걸걸한 목소리와 호탕한 성격의 여자분이었다.

딱 봐도 성격이 반대인 그 둘은 일하는 스타일도 외모를 반영하듯 반대였는데 나는 주로

호탕한 그녀와 일을 했다. 그녀는 내 시안을 보며 아주 거침없는 피드백을 내놓았다.

“음.. 아무래도 다시 해야겠어~” “이건 아닌 거 같아”


그런 피드백들을 들을 때면 주눅 든다기보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웹사이트 완료 기한이 다가오고 나는 더욱 긴장감속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늦게까지 일하다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지금도 많은 it회사들은 그렇지만

그때는 새벽까지 일하는 것들이 더욱 당연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으니 야근하는 날들은 정말 빈번했다.




새벽 1시가 넘었는지도 모른 채 집중해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 늦었으니 이제 집에 가자~”

“네 집에 가요~”

“그래 그럼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 페이지 디자인 내일 아침까지 해와!”

“?...?”

지금 새벽 1시고 집에 가서 씻으면 새벽 2시가 될 텐데.. 내일 아침까지 해오라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못하겠다는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입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맴도는데 정말 입이 딱풀로 딱 붙여놓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집에 와서 씻고 나니 예상되고 새벽 2시.

졸음이 쏟아져 내려왔지만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켤 수밖에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정당하는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컴퓨터를 켜고 새벽 4시가 넘도록 일을 했다. 

새벽이 늦었는데 방에 불을 켜고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내는 딸이 걱정되셨던 아버지는 이제 그만 자라며 늦게까지 잠 못 드는 내게 잔소리를 하셨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왼쪽 귀를 통과해 그대로 오른쪽 귀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막한 새벽 4시 방안에는 “우웅~” 컴퓨터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8시 30분 용케 늦지 않고 출근을 한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지각을 했다.

나는 새벽 4시 넘게 까지 일하고 지각 안 하려고 알람을 몇 개를 맞춰놨는데... 그녀는 지각이라니

정말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오전 10시가 넘었고 출입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오는데 눈이 딱 마주쳤다.

당당하게 지각을 한 그녀가 들어오면서 한 한마디

“디자인 해왔어?”

“네... 해왔어요”

그렇게 새벽에 디자인을 해온 것을 기특하게(?) 여긴 그녀는 그 이후로도 매일같이 밤늦게 퇴근하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해올 숙제를 내줬다. 너무 힘들어서 하기 싫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못해왔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못해왔다” 이런 말은 곧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렇게 내 컴퓨터는 매일 새벽 4시까지 우우웅~ 요란한 소리를 내면 돌아갔다.


그때는 너무 울고 싶었고 다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들이었지만 점점 나아지는 아웃풋을 보면서 견뎌냈다.

근데 그렇게 나한테 혹독하게 했던 그녀가 미웠냐고?

내 대답은 노!


그녀가 같이 일하는 동안 나의 기초체력을 길러준 덕분에 그 이후에 더 험난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쉽게 쉽게 일했다면 지금처럼 단단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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