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 없을 자유

이별에 대하여 2 - 생기라는 압박과의 이별

by 리하

33개.


이사 준비로 짐을 싸며 직접 하나하나 개수를 세어 보았다. 볼은 두 개인데 블러셔는 서른세 개다. 제품들이 깨지지 않도록 하나씩 뽁뽁이에 감싸며 생각한다. 이 많은 블러셔로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블러셔는 영어 단어 blush에서 왔다. 양 볼을 색으로 물들여 자연스럽게 얼굴에 생기를 더해 주는 화장품으로 예전에는 볼터치라고도 불렸다. 빨강이든 핑크든 오렌지든 블러셔의 목적은 같다. 얼굴에 혈색을 더해 생기 있는 모습을 만드는 것.


블러셔라는 걸 처음 써본 건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첫인상이라는 개념에 심취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표정이 적어 ‘차가워 보인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터라 ‘인상 좋아 보이는’ 사람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항상 고민했다. 내가 덜 차가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비치는 게 지겨웠다.

볼 중앙에 블러셔를 열심히 발랐더니, 사람이 조금 밝아 보이는 것 같았다. 거울 속 양 뺨을 붉게 물들인 나를 본다. 낯설다. 다시 쿠션을 두드려 색을 덮고 블러셔 색을 바꾼다. 핑크 레드 오렌지 라벤더를 오간다. 나에게 찰떡같이 어울리는 블러셔가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제품만 찾으면, 이제 나도 생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첫인상이 좋은 사람을 보면 부러웠다. 밝고 생기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보다 인생을 쉽게 사는 것 같아 질투했다. 첫인상은 3초 안에 결정되고 좀처럼 바꾸기 어렵다는 말들이 나를 휘감았다. 화장대에 블러셔가 하나둘씩 늘어갔다. 미국에서, 일본에서 직구한 택배가 도착했다. 나를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줄 그 색깔이 아니었다. 실망하고, 다시 블러셔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아직 내겐 수백 개의 화장품 브랜드가 남아 있었다. 완벽한 블러셔 찾기 미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매일 블러셔를 바르고 다니던 어느 날, 동기가 말했다. “블러셔 발랐네?” 내가 봐도 뭔가 과한 날이었다. 순간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블러셔에 홍조가 더해져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됐다. 그날 기숙사에 돌아가서 엉엉 울었다. 블러셔가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조각 났고, 평생 차갑게 보여야 한다는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처럼 블러셔를 꺼내어 화장했다. 어제보다는 연하게 칠한 블러셔를 방패 삼아 방을 나섰다.


가족들은 내게 볼에 색칠 좀 그만하라고 했다. 이젠 연하게 바르는데도 그랬다. 바르는 것보다 안 바르는 게 더 낫다며 화장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첫인상 한번 바꿔보려고 시작한 블러셔가 이젠 나를 볼 터치 없이는 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거울 속 내 모습과 주변 사람들의 말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두 뺨을 밝힌 내 모습은 좀 더 밝아진 것 같다가도, 동시에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도 보였다.

결론적으로 블러셔는 내 첫인상을 바꾸는 데 별 효과가 없었다. 블러셔를 자연스럽게 바르는 메이크업 스킬이 늘었을 뿐. 수십 개의 블러셔가 내게 질문했다. 왜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지? 내가 왜 따뜻해 보여야 하지? 나는 ‘생기 없을 자유’가 절실했다.

억지로 밝고 쾌활한 사람처럼 보이려는 노력을 멈췄다. 생기 없어 보이는 얼굴을 받아들이고, 표정이 적고 딱딱해 보이는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말과 행동, 그리고 시간으로 인상을 바꾸는 것을 택했다. 이제 남들이 나를 차가워 보인다고 하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내 일 똑바로 하면 인상은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도 수년을 그렇게 잘 살아왔으니까.


여전히 아침마다 양 뺨을 물들인다. 내가 봐도 귤색은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오늘 메이크업 컨셉은 오렌지 톤이라 귤색이 최선의 선택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블러셔 좀 그만 바르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내가 좋아서 바른다. 거울 속 얼굴이 내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따뜻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붓으로 볼을 두드리며 메이크업을 마무리한다. 생기 없을 자유 아래, 내게 귤러셔*를 허락한다.


*귤색 블러셔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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