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 속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어두웠고, 우울했고, 칙칙했다. 기생충의 배경과 스토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기생충이 그중에서도 특히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무겁고 우울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적 불평등문제를 유쾌하지만 깊고 정확하게 녹여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투쟁 없이는 바꿀 수 없는 구조, 그러나 결국 좌절되는 투쟁, 다시 원점인 현실 정도가 되겠다. 실제로 자본의 흐름에 따라 자본가-노동자로 세 가족이 표현되기도 하고, 영화 속 가족들의 경제적 배경과 그에 따른 상황의 격차가 자본가-노동자의 두 계급으로 표현되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먼저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은 직접적인 돈의 흐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연히 맡게 된 아들 최우식의 영어 과외 일을 시작으로 일가족은 점차 취직 기회를 얻어나가는데, '일리노이 시카고' 노래로 유명세를 탄 장면의 미술과외까지는 귀여웠다. 운전기사를 모함하면서부터는 너무하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반지하방 가족들은 자본가들를 위한 일자리를 쟁취해나간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이 집 사람들 잘 속아, 착해.' 라며 자본가 계급을 손쉽게 속이고 완벽한 기생에 성공함을 자축하는 가족의 모습과, 반지하방 가족의 엄마가 '나도 이런 환경에 살았으면 착했어'라고 조소하는 장면은 자본가 계급의 여유와 순진함을 비꼼과 동시에 많은 시련, 경쟁, 구조적 한계 속에서 독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많은 이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돈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바꾸고, 지키고, 또한 이 같은 힘이 대물림되는 자본가 계급은 순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고, 순진하지 못해야 살아남는 노동자 계급은 태생부터 삶의 과정 전반이 전쟁이다.
두 계급 간의 격차는 영화가 전개되며 다양하게 표현된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한, 기생충처럼 집을 빠져나와 비 내리는 길을 뛰어내려 가는 장면과 수많은 아래로의 계단은 잠시 동안이라도 자본가 계급의 삶을 누렸던 반지하방 가족들의 '원래 자리로의 이동', 계급 그 자체를 의미한다. 내려와야 하는 계단 수만큼이나 올라가기 힘든 것이 바로 그 두 가족 간의 간극이다. 또한, 빗물이 넘쳐 가슴까지 차오르는 반지하방 사람들의 아침은 수재민들을 모아놓은 체육관이었지만 대저택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한가하다.
영화 곳곳에 배치되는 두 계급 간의 이는 지하벙커에 4년째 살고 있던 이정은의 남편과 반지하방 가족이 맞닿으며 극에 달한다. 결국 대저택에 '기생충'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같은 입장이지만, 두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밟고 밟히고, 결국 찌르고 찔리며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다. 계단 저 위쪽의 자본가 계급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나 마주친 두 노동자 가족은 어찌 됐든 서로 밟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경쟁자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지하 벙커라도 빚쟁이들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 박사장(이선균)에게 죽는 순간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웃어 보이는 박명훈과, 그런 그를 코를 막고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이선균,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이선균을 찌르는 송강호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지하벙커로 기생충처럼 다시 숨어든 송강호와깨어난 최우식이 (그런 아버지가 떳떳하게 지하에서 나올 수 있도록) 그 집을 사버리는 장면을 통해 가장 강도 높았던 폭력 투쟁에도 결국, 변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결론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기생충의 의미는 돌이켜 보면, 반지하방 가족이나, 지하벙커 부부만을 일컫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이선균은 운전기사 없이, 조여정은 가정부 없이 생활이 힘든 정도이나 아이들의 경우 감정이나 행동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 딸은 과외선생과 사랑을 하며, 아들은 반지하방에서 기생하던 박명훈을 본 후의 트라우마로 유별나졌다. 그리고 그런 자식들을 둔 부모로서,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이선균 조여정네 가족 역시 기생충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선택할 수 있고 선택받아야 하는 두 계급 역시, 쌍방향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충인 셈이다.
덧붙이자면, 불평등한 구조는 비단 지하방과 대궐 같은 저택 사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개발협력을 공부하고, 개발도상국 현장에서 활동했던 나에게 불평등은 세계적이며, 더 자본주의적이고, 더 암울하며 처절하다.
불평등은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단숨에 해결될 수 없다. 불평등한 구조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아직 나는 공부할 게 많고, 사실 여전히 막막하다. <기생충>은 이런 내 막막함을 가득 담았고, 원없이 표출한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기 힘든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이 주고자 했던 마지막 희망적 메시지는, 적어도 계단 아래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냄새난다고, 뒤쳐졌다고, '이래서 안돼' 라며 무조건 괄시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무게도, 턱 높은 계단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이들의 '기회'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