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의 ‘슈퍼맨’ 파헤치기
스웨덴 도착 후 며칠 동안이나 유아 차를 끄는 아빠들을 많이 보았다. 물론 엄마들도 많이 나오지만, 한국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라 눈이 계속 갔다. 스웨덴은 성별과 관계없이 육아휴직이 자유로우니, 엄마의 육아휴직조차 자유롭지 못한 한국에서는 먼 풍경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문득 이 나라에서 아빠들의 육아 프로그램인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프로그램은 어떻게 읽혀질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능숙해지는 아빠들의 육아스킬이나 커가는 귀여운 아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긴 했으나 ‘그 아빠들’ 역시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슈퍼맨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 설령 ‘그 아빠들’이 이미 육아에 일가견이 있었더라도 이는 슈퍼맨 역할을 자처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에서 기반한다는 점, 근본적으로 그들은 육아하는 과정조차 경제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아빠도 잘 할 수 있구나’라는 사회적 인식이 퍼져가는 건 좋은 여파였으나 이보다 ‘왜 아빠들은 육아를 안해왔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통에서 기반한 가부장주의부터 남성의 육아휴직이 힘든 사회경제구조까지, 사회 곳곳에 보통의 한국 아빠들이 슈퍼맨이 되기 힘든 장애물들은 난무한다.
학위과정 중 마주친 씁쓸했던 현실 중 하나는 젠더평등한 사회를 자처하는 스웨덴 역시 여성이 남성보다 육아를 포함한 돌봄과 집안일 등 전통적인 젠더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육아휴직과 관련한 사회보장정책을 통해 이룩한 ‘젠더평등’에 대한 명성에 비해 정치사회적 영향력에서부터 돌봄, 가사노동 등 일상에서까지 불평등이 숨어있다. 유럽 젠더 지표(European gender index)에 의하면, 2021년 아이가 있는 커플에서 상근직에 종사하는 여성은 62%, 남성은 89%로 큰 격차가 나며,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에서는 여성의 영향력이 남성에 비해 55% 수준으로 거의 반토박에 가까운 영향력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어떤 이유에서든 육아휴직제 등 젠더 평등한 사회보장정책은 잘 정착되어왔으나 여성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성에 비해 크지 않을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여성의 기회 역시 제한적인 사회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육아휴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가사노동 관련해서도 현저히 타 유럽국에 비해 적은 격차를 보이지만 여전히 돌봄, 요리를 포함한 다른 집안일에 투자하는 시간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많게 나타났다. 주목할 부분은 ‘적은’ 격차란 점이다.
가사노동과 돌봄 관련한 불편한 진실은 오페어나 가정부를 고용하는 커플에 관한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정부에서 보장하는 돌봄 모델(care-giver model)로도 유명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인 가정에서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오페어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스웨덴의 오페어 고용 현상을 연구한 Anving & Eldén (2016)에 의하면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오페어를 고용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돌봄과 집안일에 대한 불공평한 분배이며, 이와 관련한 파트너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오페어를 고용한다는 응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오페어나 가정부 등을 고용할 수 있는 가정은 중산층 이상 가정이라는 것을 감안했을때, 스웨덴의 일반적인 가정에서 돌봄과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전통적인 젠더롤에서 얼마나 자유로울지 짐작이 간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관한 것인데, 유럽권에서 온 오페어 여성에 비해 다른 개발도상국(대부분 필리핀)에서 온 여성들이 돌봄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일까지 떠맡아 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와, 개발도상국 여성들에게 오페어는 경제적 기회인가 아니면 다른 젠더평등을 위한 또다른 젠더불평등인가에 대한 논의 혹은 비판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럽에서 온 여성과 개도국에서 온 여성들이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같은 여성일지라도 처한 상황, 즉 출신국가와 (아마도) 인종에 의해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이며, 이들은 애초 ‘문화교류’라는 오페어의 감미로운 수사 속에서 ‘젠더불평등’을 숨기는 역할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오페어가 개발도상국 여성과 유럽권 여성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오페어가 또다른 전통적인 젠더역할에서 기반한다는 사실과 이를 지켜나가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 애초에 스웨덴을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가정에서 젠더평등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정리하자면, 한국에서 ‘슈퍼맨’이 되기는 쉽지 않다. 우선 아빠의 육아휴직이 자유롭지 못하고, 아빠들의 육아는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보여지듯 안팎에서 다양한 제약에 마주친다. 집안에서는 아이들을 돌볼 스킬이 부족하거나 뭐가 어딨는지 혹은 요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겪는 어려움, 밖에서는 아빠들이 수유할 공간이 없고, 엄마들이 가득한 문화센터에서 아빠들은 뻘쭘함과 부끄러움을 감안해야한다. 누군가 육아를 도맡아해야한다면 ‘엄마’의 가능성이 훨씬 높으며, 이는 전통적 관념뿐만 아니라 돌봄에 관한 제도, 나아가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여성의 경제사회적 기회 등 수많은 사회적 제한에서 기인한다. 한편 이 모든 제약들이 비교적 완만한 스웨덴의 ‘슈퍼맨’은 젠더평등한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젠더평등에 기반한 사회보장제도에 의한 ‘규범’으로부터 만들어진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스웨덴의 여성들도 한국 여성들도 모두 밖에서는 유급노동을 안에서는 무급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슈퍼우먼’이다. 스웨덴에 ‘슈퍼맨’이 많긴 하겠지만, ‘슈퍼우먼’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평등에 기반한 제도가 젠더평등에 이바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며, 근본적으로 어떤 사회든 곳곳에 보여지는 혹은 숨어있는 젠더에 기반한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해나가지 않는다면 젠더평등한 사회는 영원히 없다.
젠더평등은 여기서나 거기서나 갈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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