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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ril Oct 29. 2021

에미레이트 항공 승무원의 48시간

프랑스에서 사랑하는 할머니를 보내며

새벽 3시, 알람이 울린다.

두 시간쯤 잤나.. 눈을 감았다 뜬 듯한 기분.

이륙까지 4시간쯤 남았다.


비행 중에는 기내식 한 개로는 배가 안차 두 개씩 먹고 주변에 간식들까지 항상 싹 쓸어 먹었는데, 어느 날 커버에 붙은 980kcal 글씨를 보고는 이게 내 똥배의 원인이었구나 싶었다. 기내 음식은 승객들이 장시간 비행에 저혈압을 느끼지 않도록, 고칼로리 음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때부터 조금 일찍 일어나 음식을 싸가기 시작했다.


취항지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음식물은 반입 금지다. 따라서 기내에 들고 간 음식은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모두 처리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동료들이 한국음식을 좋아해 주니, 넉넉히 싸가 함께 먹을 생각에 신이 나 용기에 담는다.







착장을 마치고 택시를 타러 간다. 크루 숙소에 살 때에는 엘리베이터만 타면 크루 전용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마음 맞는 동료와 함께 새 집을 렌트해 보금자리를 얻은 뒤로는 택시를 타고 본사로 곧장 가거나, 크루 숙소 앞으로 간다. 바람이 시원한 겨울엔 종종 걷기도 했지만, 그 두세 달 정도를 제외하곤 살이 찢어지는 듯한 더위 아래 걷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크루들의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아빠 냄새가 나서, 이제 담배 냄새까지 좋아지는 시점에 이르렀다. 가족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사무치게 느낀다.



새벽의 크루 버스는 누가 혹여 옆에 앉기라도 할까, 가방으로 옆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다리를 뻗기도 한다. 얄밉지만 그 마음을 이해 못하진 않는다. "Anti-social social club(사교를 싫어하는 사교모임)"이라는 말을 듣고 모든 크루들은 공감하며 웃었다. 매일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사람과 교류하는 게 싫으면서도, 외로움에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크루들의 마음을 온전히 나타내는 글이었다. 모두가 이어폰을 끼고, 시끌벅적한 비행기에 올라타기 전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비행 전 회의를 통해 기상정보와 탑승객의 프로파일, 외 특별한 사항을 숙지하고 48시간을 함께하게 될 동료들의 얼굴을 익힌다. 매 비행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바뀐다. 연단위로 팀을 정해 함께 비행하는 국내 항공사와 다른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늘 새로운 동료를 만나는 이 시스템이 참 좋았다. 게으르고 불만 가득한 동료를 만나면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비행들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던 것 같다.


아침에 출발하여 낮을 지나는 비행은 사람들이 깨어있어 바쁘지만, 오히려 바빠야 비행 중 피곤함을 덜 느낀다. 쉴 틈 없는 비행이 끝나고 호텔에 도착하면 다시 아침이 밝는다. 시차에 적응할 시간도 없지만, 가급적 그 나라의 시간대에 수면시간을 맞추려 노력한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서브웨이 샌드위치와 함께 장을 보고, 오랜만에 잔디밭도 걸어보고 변하는 계절을 느끼고 돌아온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면 알람 맞출 새도 없이 잠들어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두바이에 돌아와, 크루 버스에 올라 신발을 벗으며 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한국에선 전화 한 번 잘하지 않던 내가, 타지에서 외롭다고 할머니의 예쁨을 받고 싶어 전화를 건다. 통신사에서 매월 2시간 국제전화를 쓸 수 있는 요금제를 신청했는데, 친구나 가족들과는 카카오톡으로 전화를 주고받으니 그 2시간을 온전히 할머니에게 쓸 수 있었다. 늘 전화할 때마다 외교관이 된 것 마냥, 해외에서 한국을 알리는 대표가 된 것 마냥 자랑스러워해 주시는 할머니였다. 그렇게 비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언제 비행기에서 방긋방긋 웃었냐는 듯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며 알 수 없는 우울함에 사로잡혀 울다 잠에 들곤 한다.




잊지 못할 비행이 있다. 너무나 좋은 크루들과 함께한 파리(CDG) 비행이었다. 전날 밤 크루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간신히 일어나 준비를 하려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게 뭐지..' 그냥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니, 실감도 나지 않고 믿기지 않아 눈물도 나질 않았다. 준비를 마치고 호텔 로비에 내려가니 크루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도저히 그 사이에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없어 로비 한편에 서있었다.


동료의 "How are you?" 일상적인 한마디 물음에, "Good"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울음을 삼키는 나를 안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던 동료.. 너무나도 좋은 동료들과 사무장을 만나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최소한의 일만 하고, 조종실에서 별을 보며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이 비행기를 돌려 한국으로 날아간다 하더라도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다행히 나는 파리 비행을 끝으로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룸메에게 연락해 짐을 미리 챙겨 하루 일찍, 비행을 마치자마자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24시간 안에 지구 반 바퀴를 날아갔다. 생각해보니 유니폼을 입은 모습 한번 직접 보여드리지 못했다. 영정사진 앞에서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 예쁘다고 말해주는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유품으로 핸드폰을 돌려받으며, 통화기록에 이상한 번호가 가득하다고 한다. 전화기를 보곤 펑펑 울었다. 내 두바이 번호였다. 통화기록에 나 밖에 없는 걸 보며, 마음 아프고 다행이면서도 더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게 후회되고 죄송했다.

 

두바이에 있는 동안 두 명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늘로 보냈다. 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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