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해소되지 않는 질문은 이런 거다. 왜 분노가 아니라, 왜 반발심이 아니라, 수치심이 들었던 걸까. 앞을 보지 못하겠다, 한 발짝도 걸을 수 없겠다고 느끼게 한 감정은 분노나 슬픔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처음 자취하던 런던의 작은 방에서 강간을 당했을 때, 지속적인 아내 폭력에 시달렸을 때. 날 움직이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게 했던 건 수치심이었다. 강하게 사로잡는 수치심은 '오염되지 않은 나'를 연기하게 하는 기폭제였고, 그럴수록 해로운 관계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그 시기에는 일대일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맺는 모든 관계가 다 안전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내가 속한 사회가 그 폭력을 용인할 때, 그 수치심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나를 압도해버리곤 했다. 그나마 미투, 탈혼을 겪으면서 조금씩 헤어 나오고는 있지만, 끈적하게 휘감아버린 수치심이란 감정은 앞으로도 나를 끈질기게 괴롭힐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수치심은 모욕, 패배, 위반, 그리고 소외의 정동이다. 공포는 삶과 죽음에 말을 걸고 고통은 세상을 눈물의 계곡으로 만들지만, 수치심은 인간 심장의 가장 깊은 곳을 강타한다. (...) 모욕당한 이가 조소 속에서 수치심을 느꼈는지 혹은 그가 스스로를 비웃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스스로 존엄과 가치가 결여된 채로 발가벗겨져서, 패배하고 소외된 채로 남겨졌다고 느낀다. p. 27, 퍼트리샤 모런, <여성의 수치심>, 글항아리
나에게 수치심은 나 자신을 통제하는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을 때 폭발적으로 발생했던 감정이었다. 내 몸에 대한 통제를 빼앗기고, 나의 행동과 말에 대한 통제를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강한 수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나를 정말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곤 해서, 집 밖으로 나가기라도 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사람들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수치스러운 부분이 드러날까 봐 공적 관계에서조차 굉장한 긴장을 수반한 가면을 쓰고 지냈다. 성적으로 착취적인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물어 뜯기고 씹히면서 그 가면은 점점 두터워졌다. 결혼 생활 중에는 욕, 화, 소리 지름, 물건 던짐, 그 행위들 자체가 수치심을 안겨줬었고. 그 모든 폭력의 주된 목적이 나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지금은 안다.
'이혼녀'라는 해로운 낙인을 달고서도 수치심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이유는, 탈혼 후 내 삶과 생활에 대한 통제를 되찾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사하고 처음으로 내 집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난 아침, 손과 발을 꼼지락 거리며 '아 행복해'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일을 기억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그럴 수 있다는 건 정말 어려운 투쟁의 결과였다. 지금은 30년 인생 통틀어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을 스스로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하루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 선택과 내 의지와 내 욕망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그 어느 때 보다도 팔다리에 힘이 많이 돋는 요즘이다. 내 삶과 내 몸에 대한 통제력. 처음 느껴보는 이 감각을 고이고이 체화하고 싶다.
내 몸에 대한 통제력, 온전히 나에게만 있다. 발레를 하며 그 힘에 집중해 본다. 맘에 안 드는 몸짓, 지난한 버둥거림이더라도, 내 몸을 움직이는 힘은 오직 나에게서만 나온다. 그 힘을 기르라고 발레를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