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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뭉치 Sep 22. 2023

달과 가까워 달동네라던

애기방과 공부방이 있던 봉천동은 어딜 가나 밥 굶을 걱정은 없었다. 놀다가 공부방에 가면 간식이 있었고, 하굣길에 친구 집에 들르면 수저만 하나 더 꺼내놓고 밥을 먹었다. 산동네 중턱에 있는 옥탑방에서 엄마랑 동생, 그리고 강아지 두 명까지 다섯 식구가 살면서도 우리가 가난한지를 몰랐다. 그땐 정말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었다. 세상 어딜 가나 수저 한 세트만 있으면 밥상에 끼어 밥을 먹을 수 있는 줄 알았으니까. 돈이 얼마나 있는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집에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나에게 꼬리표가 되지 못했다. 변변하면 변변한 채로, 변변치 못하면 변변치 못한 채로 서로의 곁을 채워주던 친구들, 이모삼촌 쌤들이 있었다. 어쩌면 세상에 별로 무서울 게 없었어서 활동가도 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된다고 늘 생각해 왔으니.


봉천동엔 어느새 아파트가 하나둘 생겨났고, 아파트촌이 아닌 곳엔 오래된 집들이 철거되고 신축빌라가 지어졌다.


“축 분양. 지하철 2호선 초역세권, 강남까지 20분”.


친구들이 살던 집을 부수고 새로 들어선 반듯한 빌라들의 겉면엔 이런 현수막들이 붙었다. 우리 동네와 강남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친구들과 공부방쌤들이 하나둘 봉천동을 떠났다. 가난한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지역에 살지 않았고, 당연한 듯 공부방도 문을 닫았다. 이어서 우리 가족의 차례.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을 헐고 새 빌라를 짓는다고 했다. 봉천동을 샅샅이 뒤졌지만 우리가 갈 만한 집은 없어서 우리도 봉천동을 떠났다. 이삿짐 차에 짐을 싣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나오던 길, 서러운 울음을 꾹꾹 참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시간은 쏜살 같이 흘렀고, 더 이상 봉천동이 내 삶에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돌아볼 새는 없었다. 너무 바빴으니까. 그리고 어느새 서른. 이유도 모른 채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서야 내가 선 자리를 가만히 돌아본다. 분명 그때보다 덜 가난하고 덜 서러운데, 무언가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너 노동시간으로만 보면 최저임금도 못 버는 거야."

"영어도 잘하고 학위도 있는데 그걸 왜 써먹지를 않니."

"늙어서 아프고 약해지면 비참해질 거야. 그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 정신 차려. “


나와 앞으로의 생을 함께하고 싶다던 남자들은 나를 위한답시고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다행히 이제 나도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수 있어서 그들로부터 잽싸게 도망치긴 했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저런 말들을 맘속에 품은 채 내 삶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단지 그들만이 아니란 걸.


봉천동에 살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지금의 나는 분명 그때 보다 돈도 더 있고, 나이 권력도 생겼고, 더 이상 옥탑에 살지 않고, 공부도 쬐꼼 했고. 분명 더 나아진 것 같은데, 왜 그때보다 훨씬 더 쉽게 후려침을 당하는 걸까. 사람들 틈에서 내 자리를 지키려고, 겉멋 잔뜩 묻힌 똑똑한 말들을 늘어놓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나를 후려치는 게 단지 나에게 폭언을 했던 남자들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있는 척, 아는 척이 내 생존의 조건이라는 걸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알았으니까.


서른의 나는 서울에서 밀려나듯 경기도민이 되었고, 서울에 남아있는 내 친구들은 각각 서울의 동서남북 끄트머리에 산다. 얼굴 한 번 보려면 한 시간 반을 여행해야 하는 거리. 폭풍 속에 홀로 선 듯 뼛속까지 시린 외로움이 종종 찾아오는 건, 친구들을 예전처럼 자주 볼 수 없다는 이유뿐만은 아닐 거다. 가진 거 개뿔도 없는 주제에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던 동네. 그 가파른 산동네가 내 삶에 남긴 진한 그리움은 언제쯤 희미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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