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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뭉치 Mar 03. 2024

너의 졸업식

동생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학업 성취에 대한 욕망이 강했다. 나랑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운 날, 동생은 하룻밤 가출을 하면서도 교복을 챙겨서 나갔다. 나는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에서 수학을 2점을 맞았어도 아무렇지도 않던 애였는데, 동생은 악착같이 오답노트를 꼼꼼히 적는 애였다. 데모가 하고 싶던 나는 운동권 학교로 소문난 지방대에 갔고, 내가 석사 유학을 마치고 연봉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인권단체에 취직을 할 때쯤, 동생은 명문대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내가 방산업체 그린워싱을 비판하며 글을 쓰고 거리에서 데모를 할 때, 돈을 벌고 싶다던 동생은 모 대기업의 ESG 매니저로 취직을 했다. 한 집에서 나고 자랐는데 나와 동생이 살아가는 방법은 이렇게나 다르다. 나는 그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를 엿본다.


지난주엔 동생이 졸업을 했다. 데모하거나 포럼이 있을 때 빼고는 가본 일도 없던 명문대였다. 동생의 학교에는 소위 랜드마크가 있다. 학교 슬로건이 적힌 기념탑.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학사모를 쓴 졸업생들과 가족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우리 차례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아서, 동생 더러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오라고 하고 엄마와 둘이서 그 줄을 지켰다. 날씨는 춥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하필 일기예보도 보지 않은 채 길을 나선 탓에 우산도 없었다. 축 젖은 채 한 시간을 오들오들 떨었다.


엄마는 커다란 꽃다발을 두 개 들고 왔다. 하나는 동생 거, 하나는 동생의 남자친구 거였다. 동생의 동기인 동생 남친은 가족들이 졸업식에 오지 못한대서 우리가 함께 축하해 주기로 한 거였다. 아침 일찍 꽃시장에 가는 엄마에게 동생은 동생 남친 꽃다발의 색깔 코드를 주문했다고 한다. 남친이 최근에 취직을 했는데, 그 회사 로고 색깔로 꽃다발을 해달라고 했다는 거다. 푸른색 꽃다발을 들고 그 얘길 전하는 엄마에게 나는 입을 삐쭉거렸다. “아니, 이게 축하야? 걔가 회사 그 자체야?”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축하자리에 회사 로고와 회사 색깔이 끼어들 자리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를 줄에 남겨둔 채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던 동생은 이따금씩 줄로 다시 돌아와 불안한 듯 동동거렸다. 회사 임원이 축하하러 졸업식에 오고 있다는 거였다. 회사에서 높으신 분이 온다고 종종거리는 동생이 낯설었다. 늘 당차고 똑 부러진 동생인데, 어떤 사람이 온다는 게 그를 이렇게 긴장시킬 일일까 싶었다. 회사 분들과 짧은 인사를 마치고, 엄마는 같은 줄에 있는 다른 학부모에게 회사 상무님이 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엄마의 목소리에 잔뜩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우리 자매에게 어떤 모양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늘 말하던 엄마였는데, 그중에서도 엄마 어깨를 으쓱하게 할 만한 특별한 모양이 왜 없겠나 싶었다.


가끔 동생이 속한 세계가 그립기도 하다. 엘리트 사회의 일류 로고를 붙인 삶. 어디 가서 다니는 학교와 회사 이름을 말하면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삶 말이다. 내 전공분야에서 세계랭킹 1위로 꼽히는 대학원을 나와서, 교과서에도 나오는 국제단체를 다닐 땐 나에 대한 설명이 별로 필요 없었다. 지금은 내 이름이 찍힌 명함을 내밀면, 풀뿌리단체인 것부터 시작해, 어떤 캠페인을 하며, 어떤 연구와 교육을 하는지 줄줄이 읊어대야 한다. 이 과정이 대부분 즐겁지만, 가끔 피곤한 것도 사실이다. 뭐가 피곤한지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를 설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살기로 마음먹은 인생 그 자체겠지. 최저임금을 겨우 웃도는 임금은 어딜 나서기 전에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 타야 하는지, 가장 효율적으로 교통비를 쓰는 경로를 계산해야 된다는 걸 의미하고, 회원수 400여 명의 단체에서 활동가로 산다는 건, 어디 가서 마이크 한 번 쥐기 위해 수십 번 쓰고 말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함을 뜻하니까 말이다. 애써서 캠페인 하나를 세상에 내놓으면, 밤낮없이 발로 뛰어야만, 우리 말이 세상에 전해질까 말까 하니까. 우리에겐 광고비도, 홍보 전문 인력도 없어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는 게 유일한 방법인 거다, 늘 벅차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지만,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쭈글거리는 마음을 돌보는 일에도 에너지는 쓰인다. 학력, 회사, 학벌이 권력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그 이름표들을 다 떼어버린 채 존재하는 일이란 그리 안락하지는 않으니까.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구멍 난 가방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도, 어디 가서 쭈글거리지 않기가 아직까진 쉽지 않다. 가끔 엄마가 신발 좀 사라고 잔소리를 하면, “엄마, 내가 남들처럼 철마다 옷 바꿔 입으려면 활동가가 됐겠어?”라고 받아치면서도 말이다. 탈혼과 이직을 겪고 나서 예전에 편히 만나던 친구들을 만나기 싫은 건 내 안의 쭈글거림을 아직 인정하지 못한 탓도 있다.


나는 ngo에서도 잘린 경험이 있다. 나름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두번째 국제단체였다. 국제 커뮤니티에는 페미니스트 원칙이 존재하지만, 국내 사무소에서 그건 그저 장식일 뿐이었다. 영어 별명은 써도 되지만, 부모성을 다 넣은 이름은 쓰지 못하고, 남직원들은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못하는 곳이었다. 나는 명함에 모부성이 들어간 이름을 못쓰게 한다고, 입사도 전에 법원에 가서 개명신청을 했고, 옷 입는 모양을 가지고 핀잔주는 국장을 애써 무시하며 출근을 했다. 페미니스트 로고, 6색 무지개 곰돌이는 포기할 수 없는 드레스코드였으니까. 그곳에서 버티려면 그 알록달록한 것들이 마치 부적처럼 필요했다. 눈깔을 부릅뜨고 버티던 나는 결국 세 달 만에 짤렸다. 너무 급진적이라는 게 해고 사유였다. 회사에서 높은 분이 왔다고 동동거리는 동생을 보며, 나도 저렇게 했으면 안 잘렸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NGO에서도 튄다고 튕겨 나올 동안 동생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가며 적당한 자기 자리를 찾았다. 울면서도 필기구를 챙겨 할 일을 하던 동생을 보면서, 나는 종종 다혈질 성격을 좀 누그러뜨려보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나는 승질이 나면 발끈 데모할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니까, 가끔 동생으로부터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럼 나도 조금 덜 피곤하고, 엄마도 어깨가 좀 으쓱하겠지.


졸업식을 마치고 식구들과 식사를 했다. 서로 밥값을 내겠다는 엄마와 동생의 카드를 물리치고서, 내 카드로 결제를 하는 데 겨우 성공했다. 네 명이서 5만 7천원 짜리 식사를 했는데, 돈이 많이 나왔다며 내내 걱정하는 동생을 보니 내 처지가 그 정도인가 싶긴 하다. 그 걱정에 자칫 다시 쭈글거릴 뻔도 했는데, 겨우 추슬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동생아.’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그들이 나를 걱정하는 게 가끔은 미안하고 쪽팔린다.


내가 걸어 나온, 혹은 튕겨 나온 그 세계의 동생을 본다. 나는 그 세계를 아주 미워하지만, 동시에 가끔 그리워도 한다. 나에게 누가 ‘도로 그 세계로 갈래?’라고 물으면 단호하게 안 간다고 하겠지만, 안 가는 건지, 못 가는 건지 나조차도 좀 헷갈려서 종종 쭈그러든다. 맘에 안 들어도 눈으론 웃는 것, 정해진 규칙에 군말 없이 따르는 것, 상급자 앞에서 적당히 굽실거리는 것, 그 세계에서 필요한 능력이 나에게 없다는 게 가끔은 진심으로 속상하다.


회사 상무가 선물한 노란색 꽃다발이 동생의 얼굴을 환하게 밝힌다. 동생과 그 세계는 썩 이질적인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그나마 안심이 된다. 부디 그가 선 세계에서 안녕하기를. 고유한 삶을 돌보고 어느 순간에도 사랑과 용기를 잃지 않기를. 어느 세계에 선들, 그의 결과 모양대로 잘 살아가길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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