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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뭉치 Apr 01. 2024

배은망덕한 년들이 여는 세계

여성평화활동가로 살기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기획 블로그 “평화를 살다”​​​​​에서 발행된 글입니다.



군대 안 갔다와서 떨어졌나보다 하세요


스물 다섯살 때쯤이었나. 귀국 후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취준생의 삶으로 빨려들어갔다. 사회학을 전공한 나는 이렇다 할 기술도 없었고, 어릴 때 부터 꿈꿨던 대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시민사회에서 신입을 뽑는 공채는 가뭄에 콩 나듯 했고, 대학 시절의 인턴 경험을 살려 국회 보좌진 자리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쪽도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일해볼 법한 정당 소속의 의원 보좌진 인턴 자리는 스물에 하나 정도 밖에 안 됐던 것 같다. 상황이 급했으니 보이는 대로 이력서를 넣었다. 시민단체 한 곳, 의원실 두어 곳.


내가 지원했던 의원실은 국방위원회 소속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검정색 치마정장에 흰색 블라우스를 차려입고서 어색한 구두를 신은 채 또각거리며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관들은 남자 두 명, 여자 한 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본격적인 면접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최종 면접자 중에서 민영씨만 여자예요.”


국방위 소속의원의 의정활동을 강조한 거였다. 그렇게 시작된 면접,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없었다. 물어보는 말에 공들여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나와 함께 최종 단계에 들었다는, 아마도 내 또래일 남자들의 얼굴을 계속 상상했다. ‘면접관들은 그들에게 어떤 질문을 했을까. 나에게는 묻지 않은, 군대경험에 관한 질문들을 했겠지.’


30여분 간의 면접이 끝나고, 면접을 본 의원실에서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향했다. 노트북이 들어있어 크고 무거운 가방을 화장실 칸에 가져가기는 영 불편해서 세면대 한 켠에 가방을 두고 변기가 있는 칸에 들어갔다. 용무를 마치고 나와보니, 방금 전 나와 함께 면접을 봤던 비서관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나눴고, 그는 손을 씻는 나에게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에 떨어지면, 군대 안 갔다와서 떨어졌나보다 하세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생각했다. 아, 떨어졌구나. 그 자리를 빠르게 피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내가 가방을 둔 쪽에서 그가 손을 씻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떠날 수가 없었다.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에.. 면접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뒤에 통보받은 결과는 역시나 불합격이었다. 다른 면접자가 나보다는 그 자리에 적합해서 그 자리에 붙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생계가 급한 취준생에게 탈락의 경험은 쓰렸다. 신기하게도, 화장실에서 만난 면접관이 나에게 건넨 말은 위안이 되었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군대 안갔다와서 떨어진거야.’ 그 생각은 합리적이어보였다. 국방위 소속의 의원실이니까, 군대에 다녀온 남자가 나보다는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건 당연해보였다. 군대라고는 고작 애인이나 친구 면회로만 경험해본 내가 국방에 대해 뭘 알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보호라는 말이 만드는 세계


돌이켜보면 내가 살던 세계는 ‘보호’라는 단어로 가득찬 세계였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겠다는 힘 쎈 남자들의 약속으로 구성된 세계. 그 안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내 역할은 명확했다. 순종하고 고마워하는 것. 나라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쓰고, 군대에 간 친구들과 애인에게 애교 섞인 선물과 편지로 위로를 전하는 것, 예비군 복학생 모임 뒷풀이에서 술잔 부딪혀줄 상대가 되어주는 것. 그들의 수고와 희생에 대해 의심할 여지는 별로 없었다. 이 세계는 그들의 희생을 담보로 구성된 세계였으니까. “다 너를 지키려는 거야”라는 말에 길들여진 몸이 “군대 안갔다 와서 떨어졌나보다 하세요”라는 말에 반발하지 않았던 건,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어떤 순간이 있다. 처음으로 무기박람회 행사장에 가본 날이었다. 군사훈련을 가상으로 체험해볼 수 있게 마련해둔 부스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십여 분을 기다려 VR 시뮬레이터 앞에 앉았을 때, 안내를 맡았던 군인이 재빠르게 군복을 가져와 내 무릎에 덮어줬던 순간. 그의 얼굴에 묻은 친절과 자부심에, 거절의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어색하고 불편하고 쎄-했지만, 그가 베푼 건 친절이었으니까.


그 쎄함을 설명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이후로도 여러번 무기박람회와 데모들을 경험해야 했다. 무기박람회에 고용된 여성노동자들이 스커트를 입고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안내를 하는 사이, 양복을 빼입은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악수를 하고 다녔다. 10년 만에 열린 국군의 날 시가행진에서는 여성들이 짧은 치마 제복을 입고 행진을 했다.  “프리티, 프리티!”라며 환호하던 관중들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그 장면들은 내 무릎에 군복을 덮어줬던 그 군인의 친절한 얼굴과 닿아있었다. 보호라는 말이 구성하는 세계에서 이십대 여성의 얼굴을 한 나의 위치가 명확해지던 순간. 보호 하는 사람들, 보호에 걸맞는 행실을 제공해야 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낯설게 보게된 순간이다.


평화활동은 보호라는 말을 정면으로 의심하는 일이었다. 군사비를 늘리고, 무기를 생산하고, 군사훈련을 반복하는 결정들에는 언제나 불확실성과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겠다는 말들이 따랐다. 그러나 그 결정들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하고, 무한한 군비경쟁과 군사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으며,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내 이웃들을 겨누는 일이었다. 내 무릎에 덮였던 군복과 “군대 안 갔다와서 떨어졌나보다 하세요”라는 말은 전쟁을 만들고 준비하는 일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방위와 보호라는 명분이 없는 전쟁은 세상에 없으니까 말이다. 두고두고 기분이 쎄- 했던 그 경험들은 평화활동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았다. 누군가 쎄함은 과학이라고 했던가. 쎄함을 작동시키는 내 안의 빅데이터는 평화운동을 통해 만나는 현장들 속에서 계속 새로운 말들을 배운다. 평화운동을 만나면서 때로 입이 트이고, 어깨죽지로는 날개가 돋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건, 아마 그 때문이지 않을까.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여는 세계


나는 아직도 국방위 소속 의원실 면접에서 떨어졌던 날을 종종 생각한다. 7년 전 내가 오리와 시바, 쭈야, 달, 그리고 꿀벌을 알았더라면, 지금 함께 활동하고 있는 여성 평화활동가들을 알았더라면, 그때 그 화장실에서의 대화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적어도 “군대 안 갔다와서 떨어졌나보다 하세요”란 말에 쭈글거리며 감사하단 말로 퇴장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들 중 누구도 나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가부장 군사권력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서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그들의 말과 삶으로부터 배웠다. 쭈글거리는 맘을 간신히 달래며 마이크를 쥐어보는 용기, 소위 엘리트 남성들로 구성된 회의에서 쫄지 않는 배짱 같은 것들을, 동료 비남성 활동가들을 보며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다. 바쁜 하루 하루 속에서도 주변의 친구들과 길고양이의 안부를 챙기는 그들의 돌봄 속에 살며, 전쟁에 저항하는 힘은 이런 일상들 속에서 나오는 거겠지,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평화활동을 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건 어쩌면 보호해주겠다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힘쎈 사람들과 무기가 만드는 세계에 돌멩이를 던지는 일은, 그 세계가 부여한 보호라는 ‘혜택’에 저항해야만 가능하니까 말이다. 무기와 군사력이 ‘보호’하는 세계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존엄이나 우애, 사랑같은 것들-을 지킬 수 없어서 나는 평화활동을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게 ‘국방’의 책임이라면, 그 책임은 힘이 지키는 세계를 재구성하고, 그 세계를 돌봄과 대화로 채우는 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세상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호라는 말이 만드는 세계에 ‘쎄함’이 드신다면, 그 쎄함이 이끄는대로 평화운동에 오시라.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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