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 수업을 듣고
또, 순이 엄마는 순이를 두고 일하러 간다. 순이는 제발 자신의 곁에 있어주면 안 되겠냐고 한다. 순이는 늘 혼자 남겨진다.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순이는 21살 가장 예쁜 나이에 온 마음에 상처가 곪아 터져버리고 있다. 순이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들이라 해도 매 순간이 고통스러울 텐데, 심지어 순이에게 벌어진 일은 순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순이 부모의 이혼, 빨간딱지, 검정고시 고졸, 거식증 등 부정적인 딱지가 온몸에 붙었다. 순이 엄마가 밥을 좀 더 먹게 해 주었다면, 순이 곁에서 껴안아주었더라면, 순이 언니가 먹고 토하지 않았다면 순이는 다른 친구들과 같이 대학교에 입학해서 평범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순이 엄마가 아빠랑 싸우고 순이를 두고 도망가는 경험들을 딱 한 번이라도 덜 주었다면, 순이 아빠가 칼을 들이밀지 않았더라면, 순이 아빠가 순이에게 죽으라고, 너는 내 삶에 도움이 안 됐으니 제발 내 곁에서 사라져 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순이는 평범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교를 다니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순이는 바깥에 나가고 싶다. 그 마음이 너무 커서 살고 싶어서 죽고 싶다. 이대로 그냥 요양원에 가서 모든 삶의 가능성을 없애버린 채 살고 싶다. 순이는 잘못한 게 없는데 가장 많이 상처받은 피해자다.
순이 엄마는 순이, 영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고 나라 불편함 없이 자랐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순이아빠는 두 번째 사랑도 아닌 첫사랑이었다. 순진한 그녀는 세상이 그토록 힘든지 모른 채 영이를 낳았고, 순이를 낳았다.
순이 엄마에게 삶은 지옥 그 자체가 되었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 순이 아빠는 순이 엄마를 무시했다. 매달 받는 생활비는 자존심을 밟혀가면서 받아야만 했다. 왜 1년은 12개월이나 돼서 나는 12번이나 순이 아빠에게 조아려야 하나? 내 목숨과 바꿀 수도 없는 소중한 내 새끼들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버거웠다. 그런 마음이 드는 자기 자신이 제일 밉고 괴로웠다. 순이, 영이를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었다. 형편에 맞지 않는 부유한 동네로 이사 오게 되었다. 순이 아빠는 어차피 줄 돈이면서 매번 자신의 존엄을 깎아내리고 본인 어린 시절 이야기를 레퍼토리로 귀에서 피가 나게 이야기한다. 매번 순이 엄마에게 뭐가 돈이 부족하냐고 집에서 애나 보라는 말 뿐이다. 순이 엄마는 자신이 순이 엄마가 아니라 김숙희라는 여자라는 것을 잊어간다. 잊고 싶지 않은데, 잊어야만 살 수 있다. 엄마라는 딱지가 붙은 이후 숙희는 자신을 돌본 적이 없다. 매번 똑같은 옷, 똑같은 신발, 똑같은 생활.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거 말고는 없다. 20년 간 안 해본 일 이 없다. 분식집, 다단계, 전집, 옷가게, 부동산, 일반 사무직, 가정주부, 서빙, 치킨집. 순이 어미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 것 밖에 없는데 내 인생은 처참히 망가져 버렸다.
순이는 방에 들어가 나오질 않는다. 병원에서는 중증환자로 취급하고, 순이는 30kg가 겨우 넘는다. 나는 순이를 사랑하는데 순이는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나를 원망한다. 영이는 순이를 두고 떠나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 언제까지 둘이 지지고 볶고 싸울 거냐고 한다. 불행 배틀한 것도 아니고 영이는 집구석이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순이를 두고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단 하루도 나의 하루가 없는 삶이 너무 힘들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순이가 토할 걸 알면서도 밥을 하고, 순이 아빠가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는 택도 없어 내 돈을 보태 고기반찬, 밥, 국을 해 놓고 간다. 주말에는 순이는 바깥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걸 알기에 좀 더 맛있는 걸 해주려고 한다. 부추전도 해 주고,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김치수제비도 해 주고, 동네빵집에서 빵도 사 와서 같이 먹는다. 내가 못 먹어도 순이에게 해주고 싶다. 그게 엄마 마음이다.
순이엄마는 교회에 가고 싶다. 순이 엄마는 명자이모를 만나러 나가고 싶다. 순이 엄마는 죽고 싶다. 순이엄마는 잘못한 게 없는데 가장 많이 상처받은 피해자다.
순이는 잘못한 게 없는데 가장 많이 상처받은 피해자라고 생각한 가해자였다. 순이 엄마뿐만 아니라 순이아빠, 순이언니, 그리고 자신을 지나쳐온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나쁜 기억의 씨앗들을 뿌렸다. 순이엄마와 순이, 아니 우리들은 그렇게 같이 죽었다. 피해의식은 우리를 그렇게 죽였다.
순이는 순이 엄마를 다시 만나고 있다. 웃고 있지만 웃지 못하는 순이엄마가 보인다. 울지도 못하는, 차마 슬프다고 말할 수 도 없는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순이엄마가 보인다. 순이는 순이엄마를 만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크기만큼 엄마에게 받았던 사랑이 떠오른다. 한 사람이 주는 사랑의 크기를 받는 만큼 엄마가 받았던 상처가 떠오른다.
순이는 찐득한 피해의식을 걷어내며 순이 엄마가 아닌 숙희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