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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cingRan Oct 29. 2022

그래도 나는 내 안에 더 오래 남는 것을 선택할래

035. 전시



20대 때부터 내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건 사진이었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건 전시 관람이었다. 처음에는 사진, 그다음에는 그림, 그 이후에는 설치 미술 쪽으로 조금씩 영역이 넓어진 것 같다. 미술에 조예가 깊다거나 예술에 대해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떤 작품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 즐겁고, 또 실물을 크게 봤을 때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함도 있고, 가끔은 작가의 기분이나 감정도 느껴진다. 물론 내가 누군가의 작품에 내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전시를 봐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ECM: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ECM EXHIBITION 2013)> 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MMCA, 2021)> 전시를 꼽는 것 같다. 물론, 더 있지만 유독 내 안에 오래도록 잔잔하게 남아있는 전시다. 이걸 보면 사진과 미술이 내게 영향을 준 건 맞지만, 역시 문학과 음악은 떼어낼 수가 없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ECM 전시는 기간 내내 연달아 세 번을 갔는데도 매번 새롭고 여운이 오래 남았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에 <RE:ECM> 전시가 있었다. 물론 ECM 자체로도 좋았을 거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때만큼 좋았을까 생각해 보니 아닐 것 같다. 그때의 내가 그 전시를 만나 오랫동안 남아있는 여운을 원료 삼아 지금껏 살아온 거니까.


말 나온 김에, 요즘 들어 다시 가고 싶은 곳은 네카 미술관 (NEKA Art Museum)과 게티 센터 (The Getty Center). 네카는 발리의 우붓에, 게티는 미국의 LA에 있다. 공간과 작품 모두 좋았던 곳인데, 확실히 공간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와 에너지는 계속 그곳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네카에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모든 공간을 혼자 빌린 것처럼 제대로 누렸다. 머물러 있던 세 시간 동안 마주친 사람은 유럽인 노부부가 유일했을 정도. 한적한 미술관에서 벽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누렇게 익은 벼’ 그림 앞에서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게티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붐빈다는 느낌이 없어서 다른 의미의 여유가 있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나도 그들처럼 풀밭 어딘가에 누워 있었으리라. 흘러가는 구름을 아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이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덕분에 전시 관람을 제법 쉬었다가 꽤 입소문이 난 전시를 여럿 다녀왔다. 요즘의 전시 문화는 ‘작품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전시 보는 나를 찍으러’ 가는 것인가 할 정도로 줄을 서서 인증샷을 찍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작품을 보려면 그 인증샷 대열에 서있어야 할 정도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보면서 이질감을 느꼈다. 인증샷은 나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조용하고 여유 있게 작품을 즐기던 시간과 공간이 무척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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