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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Apr 16. 2023

그녀는 성폭력 피해자였다.

오랜만에 써 보는 뉴욕 의사의 응급실 이야기

어느 평일 저녁 그녀가 응급실을 찾은 이유는 복통이었다. 복통으로 응급실 오는 사람이 한 두 명인가.


그런데 레지던트가 환자분 방에 들어갔다 오더니 우물쭈물한다. "?" 했더니,


" 복통 아니고 성폭력 피해자인데요... 경찰 신고 안 할 거고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고 그냥 성병 검사만 해 달라는데요... "


그 레지던트는 다른 과에서 파견 온 인턴이라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었다.



    뉴욕의 시립병원 응급실에는 성폭력 전담 간호사가 있다. 10개가 넘는 병원을 다 커버하는 데다 호출받고 뛰어오시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대략적인 히스토리만 듣고 폭행 등으로 인한 다른 이상이 없나를 확인한 후, 성폭력 관련 나머지 검사 및 검체 채취- 미국에서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를 따른다. 나는 다수의 분들께 당장 신고하지 않더라도 검체 채취는 하는 것을 권유한다. 검체 채취는 사건 발생 이후부터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샤워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오시기를 권유한다. 행여 이미 옷 갈아입고 샤워하셨더라도 괜찮다 -  는 이 분한테 맡기는데 우리 타과 출신 인턴의 미숙함 + '더 이상 말하기 싫다'라는 그 한 마디에서 환자분이 철옹성 같은 벽을 둘러치고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것 같은데 그냥 그렇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직접 보기로 했다. 그날따라 응급실도 별로 바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간 방에는 정말 평범한, 보통의 여자분이 앉아 계셨다.


"안녕하세요. 저희 레지던트한테 미리 얘기 들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분이라고 하셨는데 많이 힘드시겠지만 환자분 안전을 위해서 저희가 여쭈어 봐야 할 것들이 몇 개가 있는데요,..."


    예상한 대로 환자분은 도대체 같은 얘기를 몇 번 반복해야 하냐고 짜증을 내셨다. 그런 환자분을 가만가만 달래며 조금씩 말문을 트는 데 성공했다. 기억을 되짚어가던 도중 그녀는 여러 번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침대 옆에 나란히 앉아 불쑥불쑥 뱉어내는 그녀의 조각난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범행은 이틀 전에 일어났다. 범인은 오랜 기간 함께한 약혼자의 친구였다고 한다. 종종 약혼자 분이 친한 친구들을 시켜서 우리 자기 잘 있나 체크하라고 보내서 별생각 없이 문을 열어주고 그 사람을 소파에서 자라고 한 후 자기는 방으로 갔는데 그만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놈은 술을 마신 상태였다고 했다.


그러고 난 후 온 집에서 그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청소를 하고 또 하고 몸을 씻고 또 씻으셨다고 했다.  원래는 가만히 덮으려고 했는데 베프가 그래도 병원을 가라고 간곡히 권유하여 이렇게 왔다고 하셨다.




'그때 문을 열어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늦었다고 그냥 돌려보낼 것을. 우리 강아지가 그렇게 짖어대더니만...


'내가 그때 왜 방문을 안 잠겄을까.


그놈이 너무 힘이 세서 도저히 내가 제압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힘이 셌어요, 너무너무...

    이런 일방적인 피해의 상황에서조차 왜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탓하는 것일까.


    


    알고 보니 이분은 유아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으신 분이셨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나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그놈이 너무 힘이 세서, 그놈이 너무 힘이 세서 를 반복하며 외치는 그녀를 보며 덫에 걸려 상처받고 울부짖는 짐승이 문득 떠올랐다.


     조용히 이건 절대 환자분 잘못이 아니라고, 환자분 오늘 이렇게 오신 것만으로도 너무 대단하시다고 절대 자기 탓하시지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 앞으로 검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어떤 주사를 맞고 어떤 약을 얼마나 먹게 되는지 설명해 드렸다. 그리고 오더 한 약들을 간호사가 가져왔다. 치료 가능한 모든 성병을 대비해서 예방적으로 항생제를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알약 개수가 꽤 되어 간호사가 떠 온 물을 다 마셨는데도 알약이 아직 남아있었다. 옆에 있는 싱크에서 수돗물을 받아 약을 마저 먹으려는 그녀에게 아서라고, 내가 정수기 물 떠다 주겠다며 컵에 물을 받은 후 따뜻한 물을 조금 섞어서 가져다 드렸다. 한 모금을 마신 그녀가 활짝 웃는다. 아 여기 온 이후로 모든 것이 다 차가워서 너무 싫었는데 이 물이 따뜻해서 너무 좋다고.  그리고 지금 웃는 이 것이 사건 발생 후 처음 웃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는 아주 작은 친절 하나도 따스한 빛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가 있구나.


    그렇게 내 쉬프트는 끝이 났다. 성폭력 전담 간호사의 도착을 기다리는 그녀를 동료에게 인계한 후 나는 집으로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왜 사건 발생 당시에 바로 말하지 않았냐는 질타를 받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별로 힘든 일이 없었나 보다. 고통이 너무나도 클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 앞에 잠시 커튼을 쳐 두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커튼 뒤에는 여전히 그 어두움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아직은, 조금만 더 하면서 이것저것 다른 것들로 주의를 돌리며 시간을 벌어본다. 그러는 사이 그 어두움은 조금씩 줄어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크게 자라나기도 한다. 커튼을 젖히고 그 어두움의 실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인내를 요구한다. 수년, 아니 수십 년이 걸릴지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평생 그 어두움을 외면하며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다음날 돌아와서 차트를 확인해 보았다. 그녀는 간호사가 도착하자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다시 굴러갈 것이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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