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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Sep 14. 2020

[독서노트]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잉그리드 길혀-홀타이 지음, 정대성 옮김, 창비)

68혁명[육팔:형명] 1968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회적 분쟁으로, 군 독재정부나 권위주의적 정권에 맞서 정치적 압력을 받던 이들이 일으킨 사회 운동을 의미한다. (wikipedia)


(68혁명의 주역들이 사전을 쓴다면)


톰 헤이든(Tom Hayden, 1939~2016) 사진: George Rose


1. 톰 헤이든(Tom Hayden): 68혁명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제국주의적 보복과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통킹만 침공 당시 나는 SDS(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 연맹)에 가입해 있었고, 62~63년에는 대표로도 이미 선출되었다. 내가 제일 먼저 주도했던 SDS 활동은 ERAP(경제적 조사와 생동 강령)이었고, 64년 말까지 125명의 학생들이 참석하는 10개의 도시 프로젝트가 연관돼 있었다.

당시엔 미국 전역에서 인종갈등이 극심해져 갔는데, 1967년 뉴어크(Newark) 폭동은 1944년 통과된 군인재사회화법과 과련이 있다. 이 법으로 백인 참전용사들이 떠나간 뉴어크에 가난한 흑인들이 이주해 오며 부동산 거래와 구직 등에서 차별을 직면해 왔고, 나는 이 폭동이 주동인물로 FBI의 요시찰(검,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또한 1968년에는 '베트남전 종전을 위한 국가동원위원회(the MOBE)'에 참여하여 시카고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존슨 정부에 의해 음모 및 선동죄로 애비 호프먼(Abbie Hoffman), 제리 루빈(Jerry Rubin) 등과 함께 기소된다.

쿠슈너(Kouchner)와 같은 인물들은 정계에 뛰어들고 '국경 없는 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를 창설하기도 했지만, 대신 그들은 68년의 反권위주의 정신을 얼마간 잊었을 것이다.


베르나르 쿠슈너(Bernard Kouchner, 1939~ ) 사진: Nicolas As Jose


2. 베르나르 쿠슈너(Bernard Kouchner): 68혁명은 후세대들에 권력과 이익을 떠나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낼 용기와 표본이 된 사건이다. 나는 프랑스 공산당(PCF)에 가입하면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는 쿠바로 건너가 후일 쿠바 통치자가 될 피델 카스트로와 낚시를 하며 쿠바에서의 민주적 선거를 허가하도록 설득했으며, 68년 5월에는 소르본 대학 의학부 휴학동맹을 주도했다.

나는 비록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와 보수주의적 내각인 드 골 정부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에 찬성했지만,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다. 혁명이 일어난 같은 해에 나는 적십자에서 나이지리아 내전 부상자를 위한 외과의로 파견됐다. 이때의 경험과 68혁명의 정신이 동료들과 '국경 없는 의사회'를 창설하도록 이끌었다. 이후에도 사회주의 당원으로 의회에 들어가 보건부에서 활동하다 시락 정부에서 보건부 장관이 되었다.
코소보 내전(1998년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과 세르비아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사태) 개입에 관하여는 톰 헤이든 등이 인도주의적 의도를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라니아로부터 지속된 폭격을 받고 한 세르비아 지도자가 찾아와 평화조약을 깨겠다며 엄포를 놓을 때 나는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우릴 협박하나? 스스로 급진주의자라 생각하나? 내가 바로 급진주의자이고,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바리케이드에서 경찰들과 대치했고, 나는 일생동안 그 바리케이드를 떠나 본 적이 없어!"(The New York Times Magazine, 2008/2/3)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ohn-Bandit, 1945~ ) 사진: Agence France-Presse


3.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ohn-Bandit): 68혁명은 프랑스에서 촉발된 학생 및 노동자 중심의 사회개혁 운동이다. 혁명의 도화선은 낭트대학(현 파리10대학)에서 처음 마련됐다. 3월 22일 밤 학생들이 낭트 대학 행정동을 점거하기 전까지 교내에서는 두 가지 논쟁거리가 불붙고 있었다. 하나는 남녀 간 기숙사 내 이성 출입 금지 교칙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부 장관 푸셰의 방침에 따른 대학의 전문화 및 산업화와 학제의 3,4년 법제화 등의 교육시책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1월 8일 교내 수영장 개관식에 참여한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 섹슈얼리티에 대한 안건이 청년문제보고서에 빠진 것에 대해 항의했다. 돌아온 것은 수영장에나 뛰어들라는 경멸뿐이었다.

3월 22일 밤에 모인 학생들의 유일한 모토는 모든 독단주의(dogma)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4월 2일에는 모든 대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을 지향하는 '비판 대학'이 열렸으며, 나는 (가짜) 화염병 제조법을 퍼뜨렸다는 혐의를 받고 폭력 선동죄로 갇혔다. 그동안 반권위주의 운동은 파리 시내 각지로 퍼져 나갔다. 나는 구치소에서 풀려나자 대학 징계위원회에 출두했다. 당시 나를 포함해 징계 받은 학우들의 사면을 주장하는 시위가 있었다. 소르본 대학은 학생들과의 토의도 없이 학교를 역사상 처음으로 폐쇄했고, 이에 파리 청년들은 라탱구역(Quartier latin) 일부 구간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쌓는다. 이것이 5월 10일 '바리케이드의 밤'이다.

정부를 향한 학생들의 요구는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그 결과 고용주 집단과 노조의 지침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주 관리' 구호가 등장한다. 관리 및 결정구조를 고용주 및 노조 중심에서 모든 노동자의 자결에 따르는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방침이었다. 이 구호는 독일에까지 퍼져 나가고, 5월 16일 노동자 총파업이 단행된다.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 ) © kba/2 handke


4.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68혁명은 언어가 천성적으로 가진 폭력성과 그에 반하는 언어적 저항이 나타난 사건이다. 페이만(C. Peymann)이 TAT(Theater am Turm)극장에서 연출했던 내 연극 작품 <카스파르>를 보며, 관객들은 객석에서 끊임없이, 한때 벙어리였으나 단어와 문법, 나아가 문장을 익히며 점점 언어가 만든 가상의 세계에 종속되는 카스파르에게 '언어로부터 탈출'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습득한 언어를 아무런 반성 없이 쓴다면, 언어에 잠재된 사회의 억압과 부조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렇듯 자연스레 관객과 카스파르가 '연대'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가 언어체계를 넘어선 차원에서 억압과 피억압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저항이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는 비너(O. Wiener)의 말은 68혁명이 여러 구호(나 외침)의 집결지이며 성명서(statement)와 같은 권위적 언어를 배제한 자유로운 대화(free speaking)를 위한 열린 장소임을 다시금 상기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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