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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Jun 24. 2023

도를 아십니까

내 전생이 궁금하다면

지하상가 통로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토요일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목적을 부여해 주는 것 같았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사람,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는 사람, 지하상가에서 옷을 고르는 사람, 하릴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은영은 빠른 눈길로 옷가게에 내걸린 무조건 구천구백원인 옷들을 훑고 있었다.     


토요일에도 회사에 출근해 일을 마친 은영은 일찍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봄 냄새가 너울대는 공기는 약속 없는 은영의 마음을 더 심심하게 만들었다.  옷을 고르는 손길마저 심심했다. 계속해서 이 가계 저 가계를 기웃거리는데 누군가 은영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저.....눈이 선해 보이시네요.” 검은 자켓에 검은 바지,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은영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네?” 은영은 당황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말을 건넨 여자와 한걸음 떨어진 곳에 또 한 명의 여자가 은영을 수줍게 보고 있었다. 거의 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두 사람은 누가 봐도 같은 일행으로 보였다.     


“눈이 선해 보이는 걸 보니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으셨군요.” 여자는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의 전생을 봐 드릴 테니 커피 한잔 사주시겠어요?” 

    

은영은 내심 반가웠다. 심심하던 차에 누군가 말을 걸어주고 좋은 말을 해 주니 더 듣고 싶었다.     

세 사람은 커피숍 창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의 빛바랜 검은 옷과 은영의 노란 꽃무늬 원피스가 대비 되었다. 스물넷의 은영은 궁금증으로 눈을 반짝이며 맞은편의 두 사람을 보았다. 은영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사람은 자기보다 열 살쯤 많아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커피향이 바깥의 봄 냄새를 묻어버린 내부는 고요했다. 2층 창밖으로 지하철역의 역사와 빽빽한 상가건물들이 보였다. 지상의 사람들은 지하의 사람들보다 더 느릿한 걸음걸이로 사월의 생기를 뿜고 있었다. 

    

“은영씨는 고려 시대에 유명한 고승이었네요.” 

먼저 말을 걸었던 여자가 말을 이어갔다. 은영의 머릿속에 역사 교과서에서 봤던 원효대사의 초상이 떠올랐다. 원효대사는 신라 시대의 고승이었지만 은영이 생각할 수 있는 고승은 원효대사가 유일했다. 반짝거리는 민머리에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은영은 그 말이 썩 맘에 들었다.   

  

“선업을 많이 쌓아 다음 생에서도 스님으로 태어났어요.” 

여자는 은영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 은영은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같은 공주가 되고 싶었다. 내심 아쉽긴 했으나 그나마 사람이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마치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은영은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어쩌나, 현생에서 아직 선업이 쌓이지 않아 위험한 일이 일어나겠어요.” 갑자기 어두운 얼굴빛으로 그녀가 말했다. 


“큰일이라뇨?” 은영은 이건 무슨 말인가 싶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엄마가 큰 병에 걸려 일찍 돌아가시겠어요.” 여자는 은영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네?” 

“네. 맞아요. 십 년 내에 엄마에게 안 좋은 병이 생겨 돌아가시겠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엄마는 지금 아주 건강하신데?” 


은영은 텔레비젼을 보며 뭐가 웃긴지 박장대소하는 엄마모습이 떠 올랐다.


“안돼요. 흐흐흐흑....” 급기야 은영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방법은 있어요.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상께 제사를 올리면 돼요.” 여자는 울고 있는 은영을 달래듯이 말했다.     


은영은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전 재산 이십칠만원을 인출 했다. 그 돈으로 조상에게 올릴 제수를 살 거라고 했다. 은영은 두 여자와 함께 시내버스를 탔다. 한 시간 정도 후에 내린 곳은 은영이 처음 가보는 도시 외곽이었다. 셋은 오래된 단독주택으로 들어섰고 몇몇 인상좋은 아줌마들이 은영을 환영해 주었다. 

    

은영은 먼저 노랑 저고리와 분홍치마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제단이 있는 큰 방으로 옮겼다. 제단 위에는 두 개의 촛불과 함께 은영의 돈으로 장만했다는 수박, 사과, 떡과 같은 제사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향냄새와 주변에서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녀는 절을 하고 또 절을 했다.     


절의 효과인지 은영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리고 양 손바닥에 가만히 올려진 촛불을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아! 급기야 내가 사기꾼에게 걸려들었구나.’ 


그 생각이 들자 은영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빨리 집에 돌아갈 구실을 생각했다.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햇살이 낮고 길게 들어왔다.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오늘 동생 생일이라.” 은영은 간신히 말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할 얘기가 있다고 잠시 더 있다 가라며 은영을 붙잡았다. 은영의 마음은 조급해졌고 서둘러 그 집을 빠져나왔다.  

   

친구들에게 들었던 ‘도를 아십니까’가 바로 이것이구나.     

‘아! 내 돈 이십칠만원! 어떻게 넌 그 돈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다 줄 수 있냐? 으이구 바보 멍청이!’ 

은영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고 창피해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사람들은 간혹 은영에게 “넌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믿어.”라고 말했다. 오늘 전 재산을 들여 그 말을 제대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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