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녀와 두 소년에 대하여
선유는 모든 걸 예감하고 있었고,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국에게 “넌 아무것도 몰라서 좋겠다.”라고 말한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굳이 알 필요가 없는 나이에 알게 된 선유에게 하루하루는 버티는 것이었고, 관계 맺는 건 의미 없는 행위였다. 그런 선유에게 다가온 정국은 딱 그 나이만큼 세상을 알았다. 그래서 딱 그 나이만큼의 순수함과 용기와 열정을 가졌다. 그래서 정구근 이미 세상을 안다고 자신하는 어른들이 간과하는 것들, 대충 넘기는 것들, 의례적으로 접근하는 것들을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며 결국은 몸을 던진다. “이상해. 내일은 학교 가는 날인데, 선유는 엄마랑 놀러 간다 그러고...” 정국은 선유의 변화를 예민하게 눈치채고 불안한 마음으로 선유를 뒤쫓는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한 번쯤 선유였기도 했거나, 정국이기도 했을 것 같다. 내 앞에 놓인 세상은 너무 작은데 그 작은 세상이 휘청거리고 있어서, 그걸 어떻게 해쳐나갈지 몰라서, 그저 그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매달렸던 시간들.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새로운 세상을 너무도 지키고 싶었던 그 순간을. 세상의 방법을 몰랐기에 더욱 나에게 소중했고 힘겨웠던 그때를.
테스는 그저 자신의 근원이 궁금한 아이였고, 4차원에 사춘기를 겪고 있는 특이한 녀석은 샘이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자신의 곁을 떠나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며 미리 그 외로움에 익숙해지기 위한 연습을 하는 꼬맹이. 5, 4, 3, 2, 1을 카운팅해야 할 만큼 홀로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은 쉽사리 지나가지 않는다. 그 카운팅은 어쩌면 내가 홀로 있을 시간을 마무리하는 숫자이기도 하지만, 내가 다시 누군가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을 고대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샘은 그래서 더욱 함께 하는 것을 원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우연히 만난 테스와 알 수 없는 이유로 헤어져 홀로 태양 아래를 걸으며, 섭섭한 마음과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던 것은 혼자 남게 된 자신을 견디지 못함에 첫 번째 이유가, 함께 하길 바랐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에 두 번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형제자매가 없는 나는 어릴 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걱정을 지금은 가끔 한다. 엄마, 아빠가 나이가 들고 결국 세상에 나 혼자 남으면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살아갈 수 있을까. 가족과 함께일 때의 그 충만함을 누구로부터 얻을 수 있을까. 나의 홀로서기는 거기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샘의 홀로서기는 한 집안의 막내로서 혼자 남게 될 미래를 생각하며 시작된다. 혼자일 때 힘들지 않기 위해 외로움에 익숙해지려는 소년은 홀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함께 했던 순간들의 추억이란 것을 깨달으며 테스를 위해 달려간다. 테스에게는 없는, 그리고 자신은 지금껏 상실만을 생각했던 그 추억을 남기기 위해.
정국과 샘은 풀숲을 달리고 맨땅을 달린다. 그들의 달리기는 자신이 마음을 준 상대를 위한 것이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게 하기 위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선유를 위한 정국의 달리기는 어른들은 모른 체 지나친 어린이의 마음을 관통하는 것이고, 제도가 보살피지 못한 삶을 구해내는 것이다. 테스를 위한 샘의 달리기는 사춘기의 치기를 치유하는 것이자 한 발짝 더 진솔한 마음에 가닿는 것이다.
선유는 몰라도 될 어른들의 세상을 그 똑똑함으로 너무 잘 알아버렸다. 엄마가 숨기려 했던 것들 또한 그는 알아낼 수 있었고 엄마가 견디는 것, 엄마의 슬픔 또한 알 수 있었다. 선유의 선택은 엄마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나를 구하지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그가 남기는 말들은 문장들 그대로가 아니라 부정문으로 들려온다. 나는 숨이 막혀요, 나는 발버둥 치고 있어요, 눈부신 바람과 햇살을 계속 보고 싶어요,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어요, 그러니 제발 나를 구해주세요. 설사 그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되더라도 자신의 마음은, 진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내일 아이스크림 먹자”라고 말하는 정국은 내일의 가능성을 선유에게 열어주는 존재다. 내일의 존재와 내일을 살아야 할 이유를 그 또래답게.
테스와 보낸 여름은 테스의 마음에 대해서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영화 속 테스는 아빠를 찾고 싶어서 깜짝 이벤트를 꾸민 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존재에 대한 고민을 가진 샘이 테스의 여름에 함께 하게 됨으로써 테스의 고민과 장난스러움이 샘의 고민과 결합함으로써 뜻깊은 여름을 만들게 된 것이랄까. 테스에게는 아빠를 찾고 아빠를 갖게 된 여름이겠지만, 샘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루하루, 자신이 함께 하는 이들이 어떤 의미이며 그래서 어떻게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 여름이다. 물론 어떤 깨달음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선유와 정국 둘, 모두의 성장을 마주하게 된다면, <테스와 보낸 여름>은 샘의 성장이 오롯이 남게 된달까.
<나를 구하지 마세요>는 한국의 슬픈 현실을 담고 있다. 가족의 동반자살 혹은 부모 중 하나가 자녀를 죽이고 자살하는 현실. 자신이 살아가기도 힘든 이 현실을 자녀가 살아갈 걸 생각하면 데려가야겠다 싶은 것이겠지만, 과연 자녀도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따르는 것일까. 선유처럼 모든 걸 뻔히 알면서,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즉 버림받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도 잘하는 똑똑한 아이가 이 세상이 무서워서 부모의 그 마음을 따르는 것일까. 어릴 땐 때론 부모가, 때론 친구가 세상의 전부일 때가 있다. 그 세상이 나를 버릴 것 같을 때 세상은 끝날 것만 같아진다. 아이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건 그들의 세상이 아직 그 정도이기 때문이지 그들이 제대로 된,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은 아닐 가능성이 99.999%다.
정책과 제도가 아무리 잘 마련되어 있어도 그것이 일반 시민들에게 가닿는 일은 쉽지 않다. 세상을 살기 힘들어지는 것은 모두 자신이 부족해서인 것만 같고 그래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 같은 게 무한경쟁 시대의 한국을 살아오며 (근근이 버티는 형태더라도) 살아남은 자들의 생각이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부조리함과 제도의 무지가 자신을 더 이상 발 디딜 수 없는 곳까지 내몰았다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들이 여전히 이 곳엔 존재한다. 선유의 부모가 어떤 문제를 겪고 내몰림을 당했든 그 아이를 구해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몫이 아닐까 싶은 게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이다. 현실을 반영하며, 그 현실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이 영화를 만든 감독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테스와 보낸 여름>은 완전히 다른 결로 에블바디 비 해피를 외친다. 역사와 문화, 생활양식이 다른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지를 보여준달까. 사실 개인주의가 강하다고 인식했던 서양의 영화를 볼 때마다 새로웠던 게 휴가 때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는 문화였다. 나 홀로 집에도 그렇고 연말연시를 다룬 영화들이나, 녹색광선의 프랑스인들이나 이 영화의 네덜란드인들이나,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가족동반 여행객들이나. 성인이 되어 독립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가족이 함께 휴가와 연휴를 즐기고 추억을 만들고 학교 생활이나 교우 관계, 연애 관계를 단속하는 모습들은 서양은 무작정 리버럴 할 것이라는 생각에 굉장한 의외성으로 다가왔었다. 이 영화 또한 한 섬에서 휴가를 보내며 ‘함께’와 ‘다같이’를 외치는 샘의 가족을 보면서 그 의외성을 한번 더 느끼며, 아빠를 찾는 테스와 아빠를 찾아주려는 샘에게서 나와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형태와 추억을 쌓아가는 공동체라는 형태를 다시 한번 바라보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선유에게는 아빠의 사업 실패와 이별, 이사와 채무 상환 불이행 등으로 인해 가족의 형태가 와해되고 서로를 지켜봐 줄 공동체가 해체되어버린 상황인데, 비록 물리적으로 의지할 수 없을지라도 마음만이라도 의지가 되었던 이들이 사라졌을 때 사람이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파산, 자활, 갱생이라는 것이 사회 시스템으로 지원되는 것과 별개로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일상의 위태로움을 위로하고 지지하는 이가 존재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를 구하지 마세요>를 보면서 선유를 향한 정국의 배려가 특히 돋보이는 장면들이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국이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선유를 배제하지 않는 법을 알았다. 정국은 모두가 지켜보는 곳에서 티 나게 자신의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 모두 다 함께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선유도 그 안의 성원으로 속하며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섬세함을 알고 있는 소년이었다. 의외로 반 친구들 중에 나쁜 아이들은 없었고 다들 서로를 배려할 줄 알아서 세상의 배제와 고단함이 이미 몸에 배여 버린 선유가 더 서글프게 다가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각자가 가진 세계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리 성숙한 아이일지라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그 아이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와 같지 않다. 이들을 그 작은 세상 속에 버려두지 않는 방법은 나의 세계로 그들을 재단하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과 시야를 어떻게 오롯이 보고 느낄 수 있는가에 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건 마음 못지않게 머리가 훌쩍 커버린 어른들에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지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은 분명하다. 때론 이런 영화를 보면서라도, 홀로 뒤에 남겨져 쓸쓸히 사그라드는 이들이 없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어른들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숙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