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녁 운동을 하는 곳이 사라질 것 같아서 끄적여보는 밤
5일간 샐러드로 저녁을 먹다가 결국 맥주와 컵라면, 과자와 편의점 김밥으로 폭식을 한 저녁, 죄책감에 조금만 걷고 오자며 집을 나섰다. 혁파로 향하는 횡단보도에서 마주한건 한 무리의 경찰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옆에는 철거에 반대하는 이들이 천막을 치고 앉아 있었다.
지난주 중반, 늘 반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시계방향으로 돌아보겠다며 입구 좌측으로 향했던 나는 길목을 막은 철문과 마주했었다. 뭐지? 물음표를 안은채 원래 돌던대로 잔디밭을 지나 미래청을 지나 sema창고 방향으로 돌다가 청년청 앞을 가로막은 설치물을 보며 아, 철거 준비중이구나, 알게 되었다. 2년간은 그대로 두는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혁파의 정상화, 철거에 반대하는 이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경찰기동대 차량과 사복 경찰관, 관련 주무관 등이 현장에 온 것이었다. 이때가 밤 9시가 지난 즈음이었는데, 40분 정도의 운동을 마친 시간에도 그들은 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다음날 저녁에도.
이곳은 과거 질병관리청이었고, 내가 서울에 처음 자리잡았던 2015년즈음부터는 서울사회혁신파크라는 이름으로 사회혁신, 사회적가치, 소셜임팩트를 추구하는 이들의 터전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일을 하던 나에게 이 공간은 낡고, 음침하고, 그럴듯한척 하지만 과거 운동권의 향수가 풍기며 약간은 쉰내가 나는, 그래서 그걸 뭘 공간까지 다 내줘가면서 하냐는 생각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갖게 된 내집, 원룸 골목을 나와 길만 건너면 혁신파크였지만 몇년간 거의 그곳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그곳은 혁신이란 이름과 함께 친동물적인 공간, 친환경적인 공간, 성평등의 공간,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지향하는 공간이자 좁디 좁은 골목과 여기저기 개발과 공사가 이뤄지던 낡은 주거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와 푸른 나무를 보고 밝은 햇살을 맞으며 숨 쉬는 공간이 되고 있었다.
밤이 되어도 곳곳을 밝혀주는 조명들 덕분에 사람들은 퇴근 후 강아지와 산책을 했고, 비슷한 반려인들과 만남을 갖고, 그 덕에 강아지들은 사회성을 키우고, 또 어느 주말은 기후위기 앞에 채식을 이야기하고, 채식을 나누고, 날과 시간에 구애없이 그럭저럭 편히 앉아서 동네사람을 만나 얘기를 하고 책을 읽고 바람을 쐬고 커피를 마시며 햇살을 맞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저녁을 먹고 혼자서 혹은 연인과 가족과 함께 걷고 뛰고 배드민턴도 치며 건강을 지켜가는 공간이었다.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가득한 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 차 없는 공간에서 안전하게 아이들이 자전거와 롤러를 타고 함께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른 동네들도 비슷하겠지만 은평구는 많은 개발이 진행되었고 또 진행 예정이다. 현재의 북한산 푸르지오와 래미안 베라힐즈가 들어선 곳도 2015년, 내가 처음 이 동네에 집을 구하고 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지금 내가 있는 곳과 비슷한 풍경이었을텐데 지금은 사실 그때가 더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각각 1,000여 세대 이상이 자리한 대단지 아파트는 입주민들에게 꽤 괜찮은 편의성을 제공한다. 단지 내에 비교적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헬스장을 비롯한 커뮤니티 시설이 있고, 대부분의 차량이 지하에 주차를 하며 안전한 지상공간에서 사람들은 산책과 운동을 즐기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아파트들은 단지 내 조경과 어린이 시설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이런 공간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면 사실 굳이 혁신파크와 같은 열린 공간의 필요성이 낮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필요성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혁신파크와 마주한 내가 사는 동네도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곳의 어떤 주민들은 혁신파크가 복합 쇼핑몰, 컨벤션 등으로 개발이 이루어져 이 동네의 지대상승에 한 몫을 해주길 바란다. 그건 이곳이 혁신파크가 되기 전부터 누군가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들은 시민들이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이 계속해서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남을 수 있길, 변화한다고 해도 부디 그런 방향성을 가져주길 바라고 있다.
혁신파크를 산책하시던 어느 어르신들은 입구의 천막을 보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기도 가면 공원이고, 저쪽에도 있고, 그쪽에도 있고, 많아 여기만큼 많은데 없어. (은평구 녹지공간이 얼마만큼이고 인구대비 어느정도인지, 서울시 자치구와 또 비슷한 인구 규모의 도시(마을)들과 비교는 나중에 할 수 있다면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도 지금은 여기 걷고 계시잖아요. 또 다른 어르신들도 말씀하셨다. 걷기에 여기만큼 좋은데가 없어, 맞아 평지고 좋아.
고작 걷기 위해 그만한 공간을 낭비하냐고 누군가는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혁신파크라는 공간이 갖는 상징성은 이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성, 그것이 가능한 광장적 성격이다. 현재 혁신파크의 유지를 원하는 이들도 이러한 ‘광장’을 지키고 싶어하리라 생각한다.
광장에 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그 위의 타인들과 느슨하게 연결된다. 같이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고, 행사에 참여하고, 다른 문화를 경험하며 방 구석의 혼자가 아니라 함께 비슷한 무언가를 하는 이들과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함으로써 느슨한 연대감과 함께 삶에 대한 에너지를 얻는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의 발걸음을 살피고 호흡과 속도를 조절하며 함께 살아가는 느낌을 알게 된다.
이 공간의 활용도에 대한 비난 혹은 비판에 있어서, 서울시 소유니 서울시 뜻이라는 행정의 입장에 있어서 왜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땅부자이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태어나냐는 얘기까지 이 논의를 확장하고 싶진 않다. 소유와 공유(커먼즈), 지대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 날 더욱더 복잡한 이해가 얽혀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근 주민들이, 시민들이 생활의 일부로 함께 해 왔던 공간의 변화에 의견을 제시하고, 그들이 경제적 이익보다는 사회환경적 이익으로서, 공동체로서 누려왔던 이익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것도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은, 살고 있는 이 땅은 어느 한 순간을 거쳐갈 뿐인 정치인의 것이 아니라 이땅의 국민들이, 시민들이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곳이다.
닫힌 공간들이 점차 열린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라도 열려있던 공간이 닫힐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 그 땅의 개발을 통한 주변 지대 상승을 염원해온 주민과 오래된 낡은 주택 단지로서 번듯한 인프라가 자리잡길 희망하는 주민과 여러 다양한 가치와 이야기들이 모였다 흩어지던 열린 공간으로서 지속되었으면 하는 주민들의 바람을 골고루 듣고 이를 잘 버무려 담아내려는 노력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그들의 바람과 공간의 고유성을 지켜가는 개발도 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앞서도 말했다시피 한때 난 ‘사회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 공간이 보이지 않는 장막을 둘렀다고 느꼈다. 대체 그놈의 사회혁신이 뭐길래 이 땅을 내주고 마을에 별 도움은 안되고. 하지만 혁신파크의 저녁을 채워주는 달리는 사람과 걷는 사람, 산책하는 가족과 연인과 반려동물,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스케이드 보드도 타고 롤러도 타고 배드민턴도 치고 캐치볼도 하는 어린이들을 보며 좁디좁은 골목뿐인 이 마을의 오아시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공간이 더욱 더 개방되어 다양한 이야기들로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요약)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유지되는 것만이 답이라곤 생각지 않음. 다만 이 곳을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의 변화를 함께 모색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임. 무작정 쇼핑몰, 무작정 컨벤션, 무작정 초고층 빌딩, 거기에 개방 공유지 한 귀퉁이. 이런 거 하지 말자는 얘기. 개발주의자들에게만 이익주지 말자는 것, 지속가능한 도시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내는가를 같이 좀 찾아보자는 욕심, 꿈, (헛된) 희망 #혁신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