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극장들
보림극장
삼일극장
삼성극장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부산의) 좌천동과 범일동. 범일동 지역은 교통부로 불리기도 하고, 육교를 지나면 나오는 현대백화점이 있는 곳은 중앙시장과 평화시장 일대이자 어르신들에게는 여전히 조방앞으로 불리는 곳이다. 경공업 발전 시기 고무공장과 방직공장, 신발공장이 위치했고 관련 종사자들이 많이 살았다. 이들에게 주말의 명화 이전에 주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만들어준 곳이 바로 동네 극장이다.
물론 남포동 일대의 극장들이 규모면에서나 최신 영화의 개봉이 바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제일이었지만, 이곳들도 동시상영관(1+1)이란 점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휴식처가 되었고, 특히 보림극장은 1970년대 유명 연예인들의 쇼를 진행하면서 아주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공연장이기도 했단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1980년대 중후반~1990년대 초반 이들 극장에 이미 지난 시절 향수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나의 등하굣길은 늘 삼성극장 앞을 지나야 했다. 집을 나와 골목을 지나 건널목을 건너 삼성극장을 지나, 다시 철길을 건너 꼬불꼬불 시장 뒷길을 거치면 학교에 도착한다. 그때 난 어렸지만 극장에 걸린 간판 속 그림이나, 입구 안내판의 영화 소개 사진이 뭘 표현하는지 매우 잘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 외설적인 노출 컷들. 그게 청소년들의 등굣길에 버젓이 노출되어있던 1990년대 초. 지금 생각하면 청소년 유해시설 취급받고, 부모님도 그 근처에는 절대 못 가게 하며, ‘얼른 저 흉물을 없애라’ 피켓을 들었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곳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몇십 년 전, 우리 부모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그곳에 먼저 자리 잡고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아가고 있던 곳이었다.
보림극장은 이 세 극장 중 가장 큰 극장이자 또한 동시상영관이었다. 부모님의 말로는 내가 아기일 때 731부대 관련 영화 마루타가 상영을 했고, 부모님은 나를 맡길 곳이 없어 데려갔다가 울어재끼는 바람에 제대로 관람을 못하고 나오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내가 자라면서 보림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은 없다. 보림극장을 비롯한 우리 동네 극장들은 성인영화나 개봉한 지 한참 된 영화를 상영하며 아저씨들이 들락거리는 낡은 곳으로 그저 내게 남아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 때는 주로 서면에 있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극장에서 심형래의 영화나 김청기의 영화를 봤고, 서면의 은아극장이나 대한극장, 남포동(시내)의 부산극장과 제일극장에서 쥬만지와 트위스터 등 외화 개봉작을 봤다. 은아극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타이타닉을 봤는데, (마치 스플렌도르 속 스플렌도르가 잘 나가던 시절처럼) 좌석이 매진인데도 표을 팔아서 극장 안에 서있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아빠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한 아주머니가 아빠 자리에 앉아버려 (착한) 아빠는 말도 못 하고 아주머니가 알아서 비켜줄 때까지 서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부산극장과 제일극장은 부산 극장 중심가 남포동의 대형 극장답게 2층까지 좌석이 있었다. 수능을 마치고 한창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겼던 20xx년. 친구랑 남포동에서 종일 영화 보고 이벤트 참여하고, 무료 티켓 받아서 또 영화 보고, 배우들 사인 받고, 인터뷰 구경하던 시절에 부산극장 2층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앞에는 낮은 담과 안전 바가 있었고, (아마도) 부산극장 리모델링 전이라 꽤 불편하고 냄새도 났다. 그땐 쥐가 나온다는 얘기도 있었으니. 어렴풋하게 남은 기억이지만 그때 그 북적거리던 남포동 골목과 피프광장, 낡은 극장을 가득 매웠던 관람객들(씨네필들), 마냥 신나서 미쳐 날뛰던 우리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영화의 전당이 생기기 전) 해운대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옮겨간 부국제가 참 재미없기도 했다. 남포동에서는 피프광장(비프광장)을 중심으로 모든 게 해결되었으니까.
당시 서면이나 남포당 극장가는 바로 앞길을 오징어, 땅콩, 쥐포 판매상들이 가득 매우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도 부산극장 앞에서는 포장마차에서 그런 먹을거리들을 팔았다. 물론 지금은 극장 안에서 다양한 맛의 팝콘과 나쵸와 핫도그를 팔아서 굳이 다른 걸 사들고 갈 필요가 없지만, 나는 어릴 때 버터에 구운 오다리를 사들고 들어가는 걸 좋아했다. 아마 제일극장에서 트위스터를 볼 때에도 흰 봉투에 빨간 글씨로 popcorn이라고 적힌 봉투와 오다리를 두 손에 들고 있었을 거 같다. 그래서 극장 안은 정말 맛있거나 꼬리꼬리 한 냄새로 가득했다. 그땐 그게 그렇게 불편한 냄새가 아니었다.
내가 훌쩍 자라고 남포동 극장가도 여러 변화를 시도했지만 다소 조용해지고, 나도 멀티플렉스 vip가 되던 2000년대 중반, 국도예술관에서 단편 영화 촬영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 일을 하고 싶었지만 감독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영화 마케팅, 투자 배급 쪽에서 일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꿈만 꿀뿐 별다른 노력은 없어서 어영부영하던 중 친구네 과에 영화감독을 꿈꾸는 선배가 이번에 단편 작업을 하는데 스탭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이걸 시작으로 이 한 몸 투신해봐야지’ 하고 밤을 새우며 일을 했다.
국도극장 2관이 국도예술관이 된 게 2006년이었으니, 아마 그 직전쯤이 아닌가 싶은데, 영업을 쉬는 날이었는지 안 하는 중이었는지 극장 내에서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해운대에서 장비를 빌리고, 남포동으로 이동해 설치하고, 리허설하고, 촬영하고, 또 촬영하고.. 고3 때도 코피 흘리며 공부한 적이 없었는데, 이틀 초노가다를 하고 새벽 해가 뜰 때쯤 집에 들어간 난 자고 일어나서 코피를 흘렸다. ‘아, 내가 이렇게 영화를 사랑한단 말이다’를 보여주는 영광의 코피였다. 하지만 영화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고, 선배도 종적을 감추고, 나는 평범한 취준생이 되었다가 지금 여기까지.
나는 시네마 키드도 아니었고 씨네필도 아니다. 스스로 그런 이름을 붙이기에는 영화를 보는 수가 매우 적고, 전문적이지 않고, 평하지도 못한다. 그저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 만들어내는 풍경이 좋고 내가 좋아하는 풍경 속에 조금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0대 후반인가, 20대 초반에 한 영화 관련 커뮤니티에서 ‘내 꿈은 꼭 내 이름이 박힌 엔딩크레딧을 보는 거다, 영화 한 편은 만들어보고 죽고 싶어요’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제는 더욱더 경로가 멀어진 것 같지만, 인생은 길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거니까 아직 너무 슬퍼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어린 내게 ‘으악, 저게 뭐야’에서 갖가지 꿈과 희망, 즐거움을 안겨줬던 영화와 영화관, 극장이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이상 그 자체로 매우 행복하기도 하니까.
7월 초에 스플렌도르를 보고 난 후, 내 기억 속의 극장과 우리가 극장에 가는 이유, 코로나 이후의 극장에 대한 연작 글을 써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워낙 게을러서 내 기억 속의 극장만 이제야 이렇게 쓰게 됐다. 난 내가 성장한 후에 보림극장에 갔던 것 같은데 그땐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는 걸 검색을 통해 확인하면서 기억 속 오류들도 수정하고, 다시 그 시절을 돌아보며 잃어버린 꿈도 떠올려보는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지난해 한 지역의 40년사를 사진과 주민들의 이야기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었는데 40여 년 전에는 카메라를 가진 분들이 많지 않아 주민들이 직접 남긴 마을의 (변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내 기억 속 부산 극장들의 30여 년 사를 구글링과 함께 휘리릭 훑어보면서 변해가는 도시와 건물, 광장과 공간의 모습들이 꽤 놀랍기도 하고, 사라져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는 것이 사진으로 기억되는 걸 느끼며 과거와 달리 카메라가 손에 딱 붙어있는 지금, 더욱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잘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이 길었다. 부산 옛 극장들의 모습을 더욱 다양하게 보고 싶으면 아래 블로그 포스팅을 추천한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khpd&logNo=220944844190&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