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전역 일기 - 1
처음 전역을 생각한 건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였습니다. 물론 그 때는 진지하게 전역을 생각했다기보다 직장생활에 대한 지루함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습니다. 정훈이라는 병과를 받아 한 해 동안 업무를 해 보고 나니 문득, 앞으로 작년과 똑같은 일들을 30년 하고도 몇 년을 더 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이제 겨우 1년을 일한 애송이가 하기에 적절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분업화가 되어 있는 조직 중 하나인 군대, 그 중에서도 공군의 정훈 병과는 기껏해야 장교가 1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집단이었으니까요. 비행단에서의 1년은 저를 포함한 우리 병과 사람들 한명 한명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이 안에서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파악하기에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갓 중위로 진급한 2년차 장교가 되었을 때 제가 느낀 감정은, 뭐랄까, 마치 한 바퀴가 1년짜리인 쳇바퀴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렇지만 그 때의 저는 군대 바깥이 막연하게 두려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한 번도 군대 밖을 나가본 적이 없는데 과연 내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마 지금 직업군인이거나 혹은 과거에 직업군인이었던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가끔씩 전역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마다 내가 바깥 사람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이 안에서 내가 하는 일들은 바깥에서 쓸모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가 머릿속을 채웁니다. 마치 내가 군대에 있었던 시간이 쓸모없는 시간이었던 것처럼 느껴지죠. 먼저 전역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공포는 점점 더 커집니다. 나는 벌써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었는데, 몇 년만 더 버티면 연금을 받는데, 하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군대라는 사회에 익숙해지고 안정적인 이 직장이 점점 더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가끔씩 내가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식물이 된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을 종종 느끼면서요.
처음에는 그 묘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새로운 취미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아마추어 극단 활동이 그것이었습니다. 아마추어든 프로든 공연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배우들이 무대에 한 번 오르려면 엄청난 노력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극단 활동이라는 취미는 제가 쓸데없는 고민을 할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는 데 꽤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하잖아요. 일은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진짜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찾으라고. 주말마다 서울을 왔다갔다하며 공연 준비를 하고 무대에서 느끼는 희열은 일로 인한 매너리즘을 잊어버리기에 딱 맞는 정도의 자극이었습니다. 게다가 저와 완전히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제가 살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었죠.
하지만 인생은 생각지도 못할 때 전환점을 맞이한다고 하던가요. 임관 4년차가 되던 해, 저는 국방부 대변인실로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다들 한번쯤 근무하고 싶어한다는 서울에서, 그것도 국방부 본청의 대변인실에서 일을 하게 되다니. 동기들과 친한 선, 후배들 모두가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저 또한 서울에서 사복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소위 말해 '민간인처럼' 일한다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보던 직장인들의 모습이 매일같이 머릿속에 그렸졌습니다. 약간 피곤한 듯한 표정과 함께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바쁜 듯이 걸어가는 출근길, 삼삼오오 점심을 먹고 스타벅스에서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는 점심시간, 해가 진 빌딩숲 사이에서 걸어나와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 심지어 서울에 살면 극단 활동도 더 편하게 할 수 있었어요. 마치 모든 게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대변인실에서 하게 될 업무는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사실 일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처음 보는 업무들을 마주할 때마다 어떻게든 해결해왔고, 더 솔직히 말하면 어차피 공공 쪽의 일은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주변에서는 제가 가게 될 사무실 과장님의 성격이 영 좋지 않으시다며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생도 시절부터 지금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설마 과장님의 성격이 이상하고 무서워 봐야 갓 사관학교에 입학했던 1학년 때보다 힘들겠어 하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놀러 다닐 생각에 빠져 일에 대해서는 너무 순진하게, 아니 오만하게 생각했던 거죠. 사관학교 출신에다가 병과에서 최연소로 국방부 근무를 하게 된 사람이라는 그런 우월감 비슷한 감정과 함께, 이제 갓 전역한 남자애들끼리 내 군생활이 더 힘들었니 네 군생활이 더 힘들었니 하면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처럼.
그렇게 전임자 선배에게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과장님께 인사를 드리던 날, 제가 처음 들은 말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어휴...영계가 왔네. 아주 영계가 왔어.
이걸 어디다가 쓰겠니. 내가 이래서 공군을 싫어한다니까.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초 단위로 얼어붙는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