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전역 일기 - 2
누군가가 저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그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저의 상사, 그것도 부서장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그리고 그런 경우, 당사자는 애초에 물리적으로 원인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입니다.
나중에 사무실원들에게 알게 된 건, 인사이동 시기에 저를 이 곳에 보내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과장님과 공군의 인사 담당자분이 한바탕 싸웠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직 대위도 되지 않은 27살의 햇병아리에 불과했고, 제 전임자분은 저보다 무려 6년이나 경력이 많은 선배였거든요. 과장님은 전임자와 비슷한 연차의 장교를 받기를 원하셨지만, 공군에서는 부족한 인력 때문에 보낼 사람이 없다며 버티다가 결국 저를 보내는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지금껏 익숙하게 일하고 있던 장교 대신 새파랗게 어린 중위를 보내겠다니, 과장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던 거죠. 그렇게 공군의 인사담당자분과 엎치락뒤치락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감정적인 언쟁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장님은 제가 사무실에 발을 들이기도 전부터 이미 '누군지도 모를 핏덩어리 영계'인 저를 싫어하셨던 거였어요.
더 큰 문제는, 제가 무슨 업무를 해야 하는지 저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행단에서는 항상 사무실 선임으로서 사무실원들을 관리하는 일을 해왔던 저에게 갑자기 홍보 캠페인을 기획해 보라니, 그것도 아무런 사수도 없이 저 혼자 말이죠. 당시에 저는 홍보는 뭐고 기획은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업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업무를 잘 모르겠으면 사무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냐구요? 이렇게 말하면 답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때 저는 제가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기분을 경험했습니다.
그 때부터 제 일상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자리에 앉으면, 다른 사무실원들이 하나같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작년 문서들과 규정들을 뒤적거리면서 눈치를 봤습니다. 하필 제 자리는 사무실 제일 구석 자리였어서, 사람들은 제가 사무실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어요. 첫 출근을 하고 일주일쯤 지났을까요, 이제는 작년 문서들을 최소 2번씩은 다 읽어서 더이상 볼 문서도 없어졌습니다. 여전히 제가 해야 할 업무는 전혀 감이 오지 않은 상태였지만 말이죠. 그러면 그 때부터는 의미없이 마우스 커서를 흔들면서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네이버에 '정책홍보 사례', '홍보 기획' 따위나 의미없이 검색하면서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빼더라도 8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걸 그 때 배웠습니다. 저를 부르는 사람도 없고, 과장님은 회의 때마다 마치 제가 들으라는 듯이 공군 선배들을 욕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는 민망한 듯이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녁 6시가 되면 과장님이 퇴근할 때까지 숨죽이고 앉아 있다가, 과장님이 사무실에서 나가면 도망치듯이 퇴근했습니다. 물론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만 있었지만,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꽉 낀 채로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면 숙소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치곤 했어요. 그렇게 집 앞 편의점에서 5000원짜리 도시락과 맥주 한 캔을 사서 집에 도착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꾸역꾸역 맥주와 도시락을 먹고 나면 어느새 해가 져 있더라구요. 그러면 문득 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벌써 잠을 자야 하고, 내일 눈을 뜨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오랫동안 혼자 살다 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점점 익숙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는 날 저녁에 아무도 없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켤 때 느껴지는 묘한 기분을 아시나요? 당시의 기분이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게다가 저는 서울에 연고도 없고 아는 친구도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주말에 만날 사람은커녕 저녁에 연락할 만한 사람도 딱히 없었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만 보낸 시간들이 아마 보름도 넘었을 겁니다. 주말에 햇빛도 들지 않는 방에서 혼자 유튜브를 보다가 문득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업무도 업무지만 이렇게 혼자서,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서울에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는데 내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지난해에 극단 활동을 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아, 그래. 집에서 시간만 때울 바에야 동호회든 뭐든 찾아가서 사람이라도 만나 보자. 뭐라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자기 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라도 들어 보자. 뭔가 도움이 될만한 걸 들을지도 모르니까.
막상 휴대폰으로 서울에 있는 모임들을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은 다양한 모임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업무와 관련된 모임에서부터 취미, 독서, 교양까지 온갖 주제의 모임들이 다 있더라구요. 심지어는 모임에 참가하려면 돈까지 내야 했습니다. 더 놀라웠던 건, 그런 모임들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돈까지 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아마 그 때의 저는 지금까지 무기력하던 저 자신이 더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을까요. 저는 어느새 강남 한복판에 있는 어떤 건물에 들어가, 처음 보는 사람들 옆에서 초조하게 앉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