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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일스팟 Sep 25. 2022

구멍이 이렇게 많은데 첫 단추 구멍이 대체 어디야

우당탕탕 전역 일기 - 3

언제나 처음이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한 말이지만, 그만큼 '첫 시작'이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처음만 견뎌내면 그 다음부터는 놀라울 정도로 싱거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처음 소셜 모임을 신청할 때의 기분은, 극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습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 공간에서, 내가 과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내가 이 곳에서 제대로 내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는 두려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극단 활동을 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저는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처음 대화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인걸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 곳에서 저는 제가 기대했던 건 다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우물 밖으로 처음 나온 개구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 곳은 강남역 근처 어딘가에 있는 건물 지하였습니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자마자 와글거리는 분위기가 저를 감쌌습니다. 순간, 갑자기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제가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에서 외부인 역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사실, 실제로 그렇게 시끄러운 분위기도 아니었고 저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돈을 내고 참여한 모임인만큼 간신히 안으로 들어와 제가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왔는데, 이미 한두 분이 자리에 앉아 계시더라구요. 숨막히는 정적. 아마 그 분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참여한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주된 골자였습니다. 사실은 제가 제일 어려워하는 질문이 저 자신에 대한 질문이라서 이 프로그램을 선택하기도 했어요. 학창시절에도 제가 제일 어려워하던 시간은 언제나 자기소개를 하거나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시간이었거든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또 뭘 잘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을 언제나 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예 정면으로 부딪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에는 그냥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쉽지 않은 서울살이에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제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사람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함께한 그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저를 받아주었어요.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사실 조금 놀랐던 게 사실입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니. 그 곳에는 40살이 가까운 나이에 주말마다 취미로 춤을 추는 분도 있었고, '그냥 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원단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옷을 직접 만들어서 입는 분도 있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앳된 얼굴에 인생 3회차는 살고 있는 듯이 말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직업도 공무원부터 엔지니어까지, 그리고 생전 처음 들어본 직업도 있었어요. 이 곳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느낌 덕분에 저는 이 '우물 바깥 세상'에 더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소개팅에 나갔을 때 남자들이 가장 하면 안 되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라는 농담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 물론 제가 그런 적이 있다는 뜻은 아니고, 저는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해석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리그! 군대스리가!

저는 자신이 경험한 만큼이 스스로의 이해의 폭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남중 남고를 졸업하고 갓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 할 수 있는 대화 소재라고는 군대 이야기와 축구 이야기 정도인 것일 테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저도 그런 '눈치없는 소개팅남'과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 딱히 꿈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도 없이 수능만 생각했던 고등학생 시절, 앞으로의 진로가 정해진 채로 4년이라는 시간을 그야말로 '버티면서' 흘려보낸 사관학교 시절, 그리고 내 10년 후의 앞길이 훤히 보이는 상태로 별 고민 없이 살아내던 장교 생활. 10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제 눈앞에 남아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주변 친구들과의 비교도 이제는 저에게 무의미했고, 남아있는 고민이라고는 어떻게 하면 선배들에게 밉보이지 않을지 하는 처세술과 군 생활에 대한 지루함 뿐이었습니다. 사실은 극단 활동도 어떻게 보면 군대라는 마을에서 잠깐 일탈해 보는, 그런 하나의 유희거리에 불과했죠.


아마 서울에 왔을 때 제가 느꼈던 당황스러움의 이유 또한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과장님이 나를 싫어하니, 일이 익숙하지 않니 하는 건 사실 그냥 그 이유의 작은 부분들일 뿐이었을 거예요. 사실은 처음으로 비행단이라는 마을을 벗어나서, 군인이 아닌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그 상황들 자체가 당황스러웠던 거죠. 아침에 출근을 하기 위해 옷을 고르고 버스를 타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 창 밖으로 보이는 여의도의 불빛까지 모든 것이 다 처음이었고, 저는 그 '처음을 겪는다'는 상황 자체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소셜 모임을 처음 갔던 날 그 공기에 짓눌려 있던 저도 아마 똑같은 이유로 공포를 느꼈던 게 아닐까 싶네요.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처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처음은 언제나 중요하고,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감정 또한 맨 처음의 감정일 때가 많아요. 저는 저 모임에서 처음으로 군대 바깥 세상은 어떤 곳일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직도 이 질문이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망가뜨린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지만, 확실한 건 저에게 굉장한 영향을 준 첫 단추였다는 거에요. 어쨌든 그 날 덕분에 저는 전역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결국 저는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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