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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 Jun 10. 2021

붓을 든 관람객

그림 하나가 던져준 생각 꾸러미


붓을 든 관람객


얼마 전, 한 전시에 다녀왔다.

한동안 뉴스에 오르내리던 '그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회를 보러 왔던 커플이 작품 아래에 놓여있던 붓으로 흔적을 남겨 화제가 되었던 '그 그림'.


선을 넘고, 그림을 망쳤다더라.

이제 거액을 물어줘야 한다더라.

뉴스에서 들려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옆에 있던 친구가 손가락으로 그림의 가운데를 가리켰다.

설명을 들은 뒤에야 진초록색 물감이 덧씌워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세 개의 초록색 덩어리가 둥글게 춤을 추고 있는 숲 요정들 같아 보였다. 앙리 마티스의 '춤'이 떠올랐다.

'추상' 위에 더해진 '구상'.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더 재미있어진 것 같기도 한데?




그림 위에 올라탄 아이


한국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의 작품 위에 아이들이 올라타 작품을 훼손한 것이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뭉개진 글자를 보면서 나도 마음이 아팠는데, 화백은 “문제 삼지 말라”라고 답했다고 한다.



만지지 말라고는 했지만, 앉지 말라는 말은 없었는 걸요


최근 스치듯 마주친 드라마 ‘마인’의 한 장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시되어 있던 고가의 의자에 아이가 앉아 의자 다리가 산산조각이 난다. 그런데 드라마 속 전시책임자는 아이와 보호자를 다독이고 의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에게 설명이 부족했다며 사과를 건넨다. 그리고 망가진 의자를 체험형 공간에 전시해 사업적으로 활용할 것을 지시한다.



다시 '그 그림' 생각을 해본다


캔버스 안에 숨어있던 그래피티를 선 밖으로 끄집어냈다

이번 해프닝이 그래피티의 본질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애초에 ‘거리의 예술’로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었던 것이 그래피티 아닌가. 살짝 덧입혀진 물감쯤이야 그래피티 정신으로 포용할 여지가 있지 않나 싶다. 존원의 그림이 그래피티를 캔버스 안으로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면, 이번 해프닝은 캔버스의 사각 틀 안에 갇혀 있었던 그래피티가 경계를 벗어나 다시 세상과 호흡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선을 넘은 돌발행동이 파괴한 작품이니 복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복원이 가능하고 작가 또한 복원을 원한다고 하니,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맞겠다. 고의성은 없었다지만, 작품이 훼손된 것은 사실이다. 창작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의 해석을 달리 가져가기를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 박대성 화백이 아이들의 흔적을 그림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복원하지 않기를 택했다고 해서 존원(JonOne)도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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