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편지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사람은 왜 편지를 쓰는 걸까? 말로 전할 수 없는 마음을 전하려는 걸까, 아니면 그 순간을 기록해 영원히 남기고 싶어서일까? 편지는 단순한 글의 집합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이다. 우리는 편지를 통해 타인과 깊게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고 또, 자신의 감정을 탐구하고 이끌어낼 수 있다. 편지는 우리가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사랑, 그리움, 감사, 혹은 이별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매체다.
편지를 읽는 평범한 일상을 고요하고 신비롭게 그린 화가가 있다. 우리에게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1665년경>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1632–1675). 그는 델프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장모님이 운영하는 여관에 작업실을 만들어 실내 그림을 주로 그렸다. 11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양육하느라 바빠서였을까? 평생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작품으로 확인된 작품 수는 35여 점에 불과하다. 그중 다수는 실내를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공간에 머물며 등장인물이 일시 정지되어 음소거된 듯한 그림들이 많다. 이런 이유로 그의 그림은 관람객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특히 편지를 주제로 한 그의 그림들은 편지 속 내용이 무엇일지 상상하게 만들며 등장인물의 감정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화면 중심에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벽에 반사되어 부드럽고 따뜻하게 그녀를 비춘다. 그 빛은 작품에 생동감을 줄 뿐 아니라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값비싼 안료로 알려진 청금석을 소재로 한 울트라마린 블루의 색이 은은히 빛나는 모습은 평범한 그녀의 일상을 신성하고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이 여인의 두 손에 들린 편지는 어떤 내용일까? 그녀의 표정 만으로는 그 내용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배경이 되고 있는 지도는 이 편지가 멀리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지도는 당시 네덜란드의 국제무역과 항해를 상징하고 있는데, 아마도 배를 타는 중인 남편에게서 온 편지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여인의 표정은 차분해 보이지만 어떤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듯 미묘한 긴장감이 보이기도 한다. 현대인들의 눈으로는 옷매무새가 임신한 여성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지만, 당시 유행했던 네덜란드 복식일 뿐 임신한 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편지를 읽는 그녀의 표정만으로는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워 감상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 그림 또한 개인적인 실내 공간인 방이 배경이다. 페르메이르는 다수의 작품에서 빛을 실내로 가져오는 '창문'을 자주 그렸다. 창문의 역할은 빛을 들어오게 하는 역할이자 안과 밖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그림 속 그녀가 읽는 편지는 외부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인 방 안을 마치 우리는 몰래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오른쪽 짙은 녹색의 커튼을 우리가 조심스레 열어젖힌 것 같다.
창문을 감싸는 붉은 커튼은 그녀의 내면에 숨겨진 감정일까? 창문의 커튼과 전경에 놓인 튀르키예에서 수입된 양탄자가 붉은색으로 짝을 맞추어서 편지를 읽는 소녀의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양탄자 위에 쓰러질 듯 배치된 과일과 접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급한 사안은 편지 속 내용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당대 사랑과 유혹을 상징하는 과일로 여겨졌던 사과와 복숭아는 이 편지가 단순한 내용전달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은밀한 대화라는 것을 알려준다.
깊숙하면서도 따뜻한 볕이 드는 벽은 그녀의 빛나는 이마와 표정, 가녀린 손에 들린 편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창문에 비친 그녀의 모습마저도 신비롭고 완벽하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 사후 원작 위에 누군가 덧칠을 했다는 것이 엑스레이 검식결과 밝혀졌다. 2018년 복원작업이 시작되고 2021년 공개된 원작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원작에 추가된 것은 벽에 걸린 액자. 액자에는 사랑의 신 아기 큐피드가 왼손에는 사랑의 화살을 들고 오른손은 추켜올린 채 누드로 그려져 있다. 큐피드의 발바닥 밑에 깔려있는 것은 속임수와 가식의 상징인 가면이다. 사랑의 신이 속임수와 가식을 누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이 편지는 연애편지라는 것.
그런데 복원된 이후 이전 작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복원 이전의 편지 읽는 소녀를 보며 차분하게 몰입하며 연애편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원작으로 복원되고 난 후 왠지 모를 복잡한 배경과 아무리 사랑의 신이지만 벌거벗은 큐피드가 여인보다도 크게 그려진 것은 아무래도 산통을 깬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원작을 훼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페르메이르는 두 작품 외에도 편지를 소재로 한 실내 그림을 여럿 그렸다. '편지'라는 주제를 통해 타인과의 소통과 인간의 내면을 전달하고 있다. 편지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인간의 감정을 이끌어 낸다. 편지를 읽는 순간은 편지가 단순히 종이 한 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온 마음이기 때문에 몰입하며 깊어질 수밖에 없다.
카톡이나 인스타그램 등의 SNS 소통은 빠르고 편한 장점은 분명 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스턴트 메시지의 속도대로 맺게 된 인연이라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늘 바쁘고 쫓기는 삶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어 놓고, 또 상대방의 진심을 전해 듣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관계에서 속도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중요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편지는 순간의 감정을 뱉어버리는 말과는 다르다. 빠르지 않지만 고심해서 쓴 마음의 글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진실되다. 설사 그것이 내게 상처가 되어 더 깊고 아플지라도 편지를 쓰고, 읽으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천천히 나를 그리고 상대방을 들여다보는 느림의 미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실내 가득 고요한 '빛'을 내리쬠으로써 평온한 일상을 마치 꿈결과도 같은 신비로움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편지'는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페르메이르의 빛'과도 같은 역할이지 않을까. 그 빛은 나와 너를 천천히 비추면서 평범한 일상이 빛나고 사랑스러워지는 마법을 부릴지도 모른다. 디지털 인스턴트 메시지에 익숙한 우리이지만 시간을 들여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의식적으로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마음을 나눌 때 비로소 나의 평범한 일상이 의미있고 빛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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