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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결혼생활 Jul 24. 2020

등잔 밑이 어둡다

나는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는 직업을 가졌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수많은 사람을 마주 본다. 이론과 경험으로 무장한 나는 사람들의 심리를 좀 더 전문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전문적’이란 말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한 사람, 특히 이해가 가지 않는 존재가 있다. 도통 이해하려 해도 항상 새롭다. 손가락 사이를 지나는 바람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 대상은 바로 내 아내이다.


최근 한 예능 프로에서 성격 유형을 알려주는 MBTI가 소개된 적이 있는데, 그래서 MBTI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아주 커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혈액형이나 손가락 길이 등을 이용해 성격을 파악하고 싶어 한다. 사람의 성격이란 것이 겉으로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그 유형이 너무나 다양하기에 사람들은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혈액형과 손가락 길이로 성격을 파악하려 한다. A, B, O, AB형, 딱 4가지, 얼마나 간단한가.


맥주를 한잔하면서, MBTI 성격 유형 설문지를 아내에게 작성해 보라고 했다. 재미 반, 궁금증 반으로. 신중한 아내의 얼굴에 핸드폰 액정의 빛이 반사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음, 아마도 내 아내는 ISFP일 거야. 감정적(F)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잖아.’ 직업적 전문성에 기댄 은근한 자신감을 느끼며 결과를 기다렸다.


“난 ISTP래. 이건 여자에게 흔하지 않은 거라는데? 만능 재주꾼 형이라고 하네.”


‘T?’ 난 속으로 3/4가 맞았다는 기쁨보다는 1/4이나 틀렸다는 놀람에 검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전문가인 내가 몇 년간 곁에서 지켜본 아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결과를 부정했다. 참고로 T는 사고형을, F는 감정형을 말한다. 여기서 사고와 감정은 판단 기준으로서 사고형은 판단 시 사실과 진실을, 감정형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옳고 그른가’로 판단하는 사고형, ‘좋고 싫은가’라고 판단하는 감정형의 두 종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 아내가 나에게 욱할 때, 물론 내 잘못이 95%이지만,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특히 정치 이야기나 앞으로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아내가 화를 낸다(적어도 아내가 화를 낸다고 난 느꼈다). 왜 아내는 화가 난 거지? 화낼 일도 아니잖아? 난 이렇게 차분하고 논리적인데. 나는 나도 모르게 아내를 감정적인 사람으로 몰아세운 듯싶다. 감정적이라는 것이 열등한 것인 마냥. 하지만 내가 틀렸다. 사실 내 아내는 나보다 더 논리적이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에 바탕을 두고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정치색과 돈에 대한 가치의 판단 기준이, 나와 다를 뿐이었다.


재미로 한 MBTI였으나, 거기서 얻은 통찰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섰다. ‘나는 왜 이제까지 내 아내를 이리 몰랐을까?’ 갑자기 아내를 오해한 내가 부끄럽고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직업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탐구했지만 아내를 제대로 탐구하지는 못했다. 아니, 탐구하려 했으나 잘못짚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다시 느꼈다. 내 아내를 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난 등잔 붙을 켰으니 모든 게 보인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오늘 아내를 배웠다. 나보다 더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나를 배웠다. 내 등잔 밑이 아주 어둡다는 걸. 고맙습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남편을 참아준 아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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