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증만 따면 전문가일까?
자격증 공부가 내게 준 것 3
30년쯤 전에 기술사 자격증을 땄었다.
기술계에서는 최고의 권위와 실력을 인정해 주는 자격증이었다.
굳이 견준다면 기술계의 박사학위라고도 했다.
당시엔 이 자격증을 따면 팔자 고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다.
그땐 실무경력이 최소 7년은 있어야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이론적 바탕도 탄탄해야 하지만 실무 능력과 경력을 어느 정도 갖춘 사람만 도전하라는 취지였다.
나는 미리 단단히 준비했다기보다는 어느 날 아내가 자존심을 긁는 바람에 엉겁결에 도전했었다.
"나도 남들한테 남편 자랑할만한 거 하나 해보는 게 어때?"
아내는 동창회 모임이라도 나가면 위축되었던 모양이다.
여자들은 동창회만 갔다 오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며칠 후 스치듯 무심코 던진 아내의 한마디는 내 속을 한번 더 뒤집어 놓았다.
"기술사 한번 따봐라, 따기만 하면 자동차를 바꿔줄게"
교통사고를 낸 후 수리했던 차를 운전할 때마다 새 차로 바꿔볼까 하고 있었던 내 욕구에 불을 지폈다.
사실 나는 대단한 자격증으로만 알았지 기술사의 '기'자도 모르고 있었다.
다음날 출근해서 선배들에게 문의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인터넷이 없어서
어느 선배로부터 한 해의 시험일정 공고가 실린 신문지 크기 만한 안내문을 한 장 얻었다.
시험일까지 두 달 남짓 남았었고 원서접수가 진행 중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정말 뭣도 모르면서 덜컹 원서부터 접수했다.
하지만 내심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몇 달 전 대학원을 졸업했기에 관련분야 이론에 대해서는 자신 있었다.
입사 후 해당 분야의 업무도 계속하고 있었기에 실무경험도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학시절 교재와 학술지, 관련 시사들을 읽으며 준비했다.
열심히 공부한 덕인지 아니면 운이 너무 좋았는지 나는 단번에 1차, 2차 시험을 통과했다.
더구나 최고 득점자였다.
당시엔 기술사 시험 최종결과가 신문 기사에도 실렸었다.
회사에서 화제가 되었다.
어렵다던 시험에 단번에 최고득점을 받으며 합격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회사 홍보로 보면 이만저만한 자랑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장 비서실에서 연락까지 왔었다.
사장님이 수석 합격자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다면서 일대일 면담시간을 잡았다고 했다.
최고 경영자가 말단 직원을 만나겠다고 할 정도의 결과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이 보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못했던 스트레스를 겪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내가 대단한 전문가로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기술사가 흔치 않던 시절이니 자격증만 놓고 보면 그럴 만도 했었다.
직원들로부터 관련분야라고 생각되는 애매한 사안에 대해 문의전화를 자주 받았다.
하지만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고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할 역량을 갖추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직 노련하게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는 짬밥도 안될뿐더러 전문지식은 여전히 넓고 깊지 못했었다.
그렇다고 잘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기술사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비아냥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소릴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격증은 자격증일 뿐이었다.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경험과 상황판단 능력이 더 필요할 때가 많은 법이다.
실무경력 7년밖에 안되던 내가 다양한 상황의 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대응할 역량이나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자격증 소지는 진정한 실력이나 내공과는 별개였던 것이다.
정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서 '메티스'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메티스는 원래 영어로 잔꾀 또는 교활한 지식이라는 뜻이다.
스콧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 온 실용 지식과 지혜의 포괄적 개념으로 메티스를 확대 해석한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서 고난을 마주할 때마다 발휘한 상황 이해 능력과 적응 능력을 예로 든다.
더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테크네'라는 개념과 대비 시킨다.
사전식으로 의미를 설명하기보다 현실의 예를 들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학원에서 배운 대로 재료를 정확히 계량해서 만든 요리보다, 할머니가 적당히 손으로 이것저것을 뿌리고 주물러서 만든 요리가 맛있는 경우가 많다.
교재의 레시피 대로 만든 음식보다 경험 많은 할머니의 손맛이 들어간 요리가 제대로 인 것이다.
이 경우 요리 책의 레시피가 테크네라면 할머니의 손맛은 메티스이다.
자전거 타는 방법에 대해 잘 설명해 놓은 매뉴얼이 있다고 치자.
처음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가 이 매뉴얼만 숙독해서 그대로 한다고 바로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실제로 타보고 넘어지고 깨지기를 반복하는 시행착오 끝에 균형 잡기와 속도를 조절하는 감각을 체화시켜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때 매뉴얼은 테크네이고 체화해서 느낀 감각이 메티스이다.
자격증을 땄다고 바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책에서 터득한 지식만 필요한 게 아니다.
말이나 글로 설명할 길이 없는 감각이나 지혜가 더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논리적 이론도 중요하지만 오랜 경험과 상황적응 능력도 중요한 이유다.
기술사가 된다는 것은 전문가로서 최소한의 지식과 경험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본격적인 전문가로서의 길은 지금부터라는 의미이다.
세상은 쉴 새 없이 변한다.
지식과 기술은 말할 것도 없다.
기존의 지식과 기술이 하루아침 쓸모없어질 수 있다.
전문가는 늘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점검하고 새롭게 갈고닦아야 한다.
기존에 하던 대로만 하면 전문가가 아니다.
변화하는 상황과 여건에 맞추어 계속 공부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 들어야 한다.
더불어 많은 실무 경험을 하면서 자신만의 혜안과 감각도 길러야 한다.
다양한 상황의 경험을 축적해서 보이지 않은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기술사라는 자격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름만 전문가일 뿐이다.
낡은 지식과 경험만 가지고 전문가 입네 하면 고집만 피우는 기술 꼰대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기술사라는 자격증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경험해야 하는 고난의 티켓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