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되고 있는 디자인
얼마 전 디자인학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있는 분에게 인터뷰 요청을 받았는데 ‘과거와 다른 요즘 디자이너 또는 디자인 방식의 특징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가 인터뷰 질문 중의 하나였다. 이제 디자인을 시작하는 학생들이나 주니어 디자이너에게서 많이 보게 되는 점은 이렇다. 디자인 자료가 풍부한 상황에서 디자인을 하다보니 과제 자체에 집중하여 창작하려하기보다는 기존 디자인 중에서 적절한 스타일이나 형식을 '선택'하여 적용하려는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디자인 아이데이션의 과정에는 창작의 즐거움도 있지만 고통도 수반된다.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안개 속을 걷는 듯이 막연하고 갑갑한 마음도 든다. 요즘은 수많은 포트폴리오 사이트들이 존재하고 누구나 쉽게 다양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다보니, 소위 ‘레퍼런스’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상에서 참고할 만한 디자인을 찾는 일을 효과적인 접근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디자인 기획 단계에서 디자인의 무드나 브랜드의 키 모티프에 관련된 이미지를 모아 아이데이션의 기틀을 마련하고 방향성을 설정해보기 위한 무드 보드는 참고할 기존 디자인의 모음이 되기도 한다. 과거 외국에서 온 예술 전문 서적을 큰 맘 먹고 사서 색다른 디자인을 접하여 시야를 확장하려했던 라떼 이야기를 들먹이면 옛날 사람임을 인증할 뿐이다. 재편집을 하는 것도 디자인이라 할 수 있고, 다른 디자인을 보면서 방향을 잡아나가거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브랜드를 창의적으로 남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클릭을 통해 기성 디자인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아쉬운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폰트가 개발되어있다보니 브랜드 네임을 표현하는 워드마크를 디자인하는 일도 창작으로서의 접근이 아닌 ‘선택’의 방식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워드마크 디자인은 폰트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폰트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글을 동일한 형태로 적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어진다. 영문의 알파벳 낱글자들은 형태, 폭, 높이 등이 다른데 어떠한 글자들이 조합되더라도 글줄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진다. 그러함에도 조합되는 글자의 상황에 따라 글자간 간격이 미세하게 일정하지 않을 수 있고 글자간 어울림에 정리가 필요할 수 있다. 긴 글에서는 이런 것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브랜드 네임은 보통 단 몇 글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자의 조합에 따라 긴 글로 적을 때와는 다르게 디테일에 대한 세부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세리프가 있는 폰트라면 긴 글에서 눈에 띄지 않던 것이 단 몇글자로 조합된 형태로 보면 세리프의 크기나 형태가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브랜드의 특정 무드를 표현하기에 딱 어울리지 않거나 디테일에 대한 조정이 필요해 보일 수 있다. 이를 다 무시하고 본인이 가진 폰트 중에 선택하여 로고로 적용한다면 최선의 디자인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폰트를 구매하지 않고 로고에 적용할 경우 문제시되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브랜드를 위한 로고는 누구나 쓸 수 있는 범용적인 폰트를 활용하기 보다는 레터링을 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디자인을 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슷비슷한 디자인을 만들지 않고 세상 하나밖에 없는 브랜드를 위한 최적의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디자인에 의존하여 선택하는 방식이 아닌 창작을 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