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 선택이 아닌 레터링으로의 접근
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에 다닐 때 '레터링(Lettering)' 이라는 수업을 제일 좋아했었다. '레터링'이란 문자로 하는 디자인이다. 수업 과제로 당시 대표적인 소다 음료였던 '데미소다'의 로고를 컴퓨터가 아닌 모눈종이 위에 로트링 펜을 가지고 디자인했었는데, 일러스트나 다른 시각 요소없이 글자만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글자간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내는 섬세한 작업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졸업 후 진로를 생각할 때 폰트 디자인이나 브랜드 디자인 중에 고민했고, 약 1년 정도 폰트 디자인을 하고 이후 브랜딩을 해오고 있다.
애플 같은 브랜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브랜드는 브랜드 네임을 시각화한 워드마크 형태를 로고로 사용하기에, 디자이너가 레터링을 잘하면 아무래도 로고를 디자인하는데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수업에서 로고 디자인 과제를 내면 상징적인 심벌 디자인은 열심히 고민해 오고 정작 중요한 브랜드 네임을 표현한 로고타입은 해오지 않고는 한다. 심벌은 무엇을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만 워드마크는 필요성을 모르거나 심벌이 결정되면 폰트를 적당히 골라서 적용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에 설치된 많은 폰트 중에 선택만 하면 손쉽게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기 때문에, 로고를 만드는 일이 '레터링'의 개념으로 디자인을 하는 것이 아닌 폰트를 '선택'하는 문제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폰트는 기본적으로 로고를 디자인하기 위해서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폰트는 동일한 형태의 글줄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다. 어떤 글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무한대로 동일한 문자 형태를 만들 수 있다.
쉽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이는 폰트를 그대로 로고 디자인에 적용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
첫째, 긴 글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된 폰트가 로고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폰트는 긴 글에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짧은 길이의 브랜드 네임에 적용하면 글자의 조합에 따라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미세하지만 자간이 일정하지 않아 조정이 필요해 보일 수도 있다. 몇 글자 안되는 로고에서는 작은 디테일의 차이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브랜드 네임으로 많이 활용되는 라틴 알파벳은 글자마다 형태가 다양하다. g나 q처럼 베이스라인 밑으로 내려가는 글자, t나 f처럼 소문자 윗선에서 튀어나오는 글자, i처럼 폭이 좁은 글자, O와 같이 폭이 넓은 글자, 획이 많은 글자, 획이 적은 글자 등과 같이 각기 다른 형태의 문자는 길이가 짧은 브랜드 네임에 적용할 경우 각 글자의 작은 디테일들이 도드라져 보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긴 글에서 아무렇지 않았던 세리프의 디테일이 로고에서는 과하게 보이기도 한다. 로고는 문자간 조화와 균형이 완벽한 하나의 그림이 되어야 한다.
둘째, 브랜드의 톤앤매너와 개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폰트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폰트는 어떠한 방향이 좋을지를 검토하고 구성되어있는 낱글자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브랜드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딱 어울리는 폰트가 있을거라는 생각보다는 스스로 브랜드에 딱 적합한 로고를 레터링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디자인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폰트 저작권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로고에 사용시 별도 계약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폰트 라이센스도 있기에 사전 확인이 필요하다.
폰트가 브랜드 이미지에 그대로 사용한 로고도 존재하지만 대체로 위의 경우와 같이 브랜드 이미지나 디테일의 균형감 등에서 완성도가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폰트를 선택하는데 그치기 보다는 브랜드 이미지와 전체적인 균형감 등을 고려하여 세심하게 디자인하는 레터링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