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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Apr 13. 2021

뒤돌면 잊을 수 있는 이유

<나뭇잎이 마르고>,김멜라


발목을 자주 접질리는 편이다. 목발을 짚고 다닌 적은 없지만 일주일을 꼬박 차 타고 등교해야만 했다. 그럴 때면 좁은 길은 더 좁고, 넓은 길은 더 넓게 느껴졌다. 이 길을 막 다닐 수 있는 거리의 사람들이 사무치게 부러웠고, 멀쩡한 다리가 갖고 싶었다. 그리고 다리가 다 낫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겠다고, 그러니 제발 나아만 달라고 밤낮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그런 발목은 하루 아침에 낫는 게 아니라 서서히 괜찮아져 어느 순간 언제 아팠냐는 듯이 괜찮아진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 불편해봤냐는 듯이 자연스레 걷고 뛰었다. 두 다리에 대한 생경한 기쁨과 감사는 순식간에 잊혔다.



멀쩡하면 뭐든 잊고 살 수 있다. 당장의 불편함이 없는 삶이란 그렇다. 불편하지 않다는 건 또 하나의 자유였다. 어느 하나 불편하지 않은 조건 아래에선 내가 가진 조건이 무엇인 지 불식할 자유가 주어졌다.



이런 생각 또한 아주 잊고 살다가, 한 교양 강의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교수님께서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캔음료를 보시더니 그런 말씀을 꺼내셨다. 이 음료수 좋아하냐고. 네 좋아합니다. 그러면 학생은 다른 많은 맛들 중에 이게 좋아서 골랐겠네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냥 아이스브레이킹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말씀에 강의실의 모두가 표정이 굳었다. 시각장애인은 그럼 이런 캔음료를 어떻게 고를 것 같아요? 맛을 보고 고를 수 없는 사람들에겐 어떤 선택지가 주어질까요. 이 캔음료 보시면 윗면에 우둘투둘한 게 있죠. 네, 점자입니다. 이걸로 캔음료인 걸 알 수 있어요. 옳타구나 싶었다. 내 시선의 밖에는 그저 낭떠러지인 게 아니라 점자와 보도블럭으로 이어진 또 다른 이의 길이 있는 거구나, 안심했다. 그런데 그 점자는 콜라에도 복숭아 음료에도 오렌지 음료에도 모두 똑같이 '음료'라고만 써져있다고 한다. 그래서 볼 수 없으면 오롯이 혼자서 음료를 고를 수 없다. 당연했던 선택이 사실은 또 하나의 특권이었다. 만약 특정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도움없인 음료를 마실 수 없을 수도 있다고 교수님이 덧붙이셨다. 그 좁은 강의실에 있는 모든 눈엔 장애가 아직 없었다.



그 충격에 한동안 학교의 장애 시설에 집중하며 캠퍼스를 오갔다. 학교 정문에는 천 여 개의 음식점이 있는데, 그 중에 휠체어가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열 곳 언저리라는 다른 조의 발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도 여럿 됐다. 어느 단과대는 엘리베이터는 없고 도서관은 고층에 있어 지체장애인은 이용이 어렵다고 한다. 입학식 때 신입생 다같이 오리엔테이션을 들었던 대형홀은 경사로가 없어서 휠체어를 이용하셨던 학우분은 많은 학우의 도움을 받아 입퇴장했다. 모두의 표정에 익숙함이나 당연함은 별로 없었다. 한번은 교내의 점자블록만 따라서 여기 저길 산책한 적이 있는데, 길이 자꾸 끊겼다. 운이 좋으면 돌아갈 길이 있었고 대부분은 그 길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 길을 더 잇기 위해선 또 도움이 필요했다.



이 사실에 통탄했던 거 같다. 모든 사람이 같이 누릴 수 없는 게 겨우 길이었고 식당이었고 도서관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걸 기본권이라 배웠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있는 이 공간은 그런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게 화가 났고 나의 무지가 한심했다. 그래서 학생회에서 관련 공약을 담당하는 부처 선배에게 이것 저것을 말했다. 우리 학교 너무 한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겨우 일주일 남짓한 경험담을 열의 띄며 전했다. 그런데 언니의 대답은 그랬다. 이미 대부분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이러저러 요구를 학교본부 측에 하려고 장애학우들과 면담을 나눴었다. 그런데 그는 지겹다고 했다. 우리학교는 지체장애학우가 수강하는 수업은 무조건 1층으로 강의실을 교체하고 있으며, 도서관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중앙도서관에서 받아볼 수 있게 돼 있다. 장애학우 대우가 전국적으로 봐도 준수한 수준이라고, 현실적으로 뭘 더 요구하냐 말했다. 학교에 대한 만족도가 대단히 높다고 또박또박 말하셨다고 한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걸 단상에 취해 추진하는 건 오지랖도 안 되는 그냥 폭력적 염결주의일 수도 있다. 모든 어려움과 부당함을 나는 명백히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나뭇잎이 마르고>의 '체'를 보면서 그때 학교에 만족한다 대답했다는 한 장애학우의 이야기가 다시 상기 됐다. 비장애인 친구와 전시관에 간 체는 아무렇지 않게 장애인은 동반 1인까지 무료라 말한다. 그 말에 친구는 잠깐 멈칫 했다가, 멈칫했단 사실에 다시 또 멈칫한다. 그런 태연함이 좀처럼 넘어가질 않고 오래 까끌거린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일에 태연하는 것. 그 과정에서 아무런 가해가 없는 것. 그 중간을 찾아 헤매려면 뒤돌지 않고 잊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시선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부터 인정해야겠지.







체는 남보다 빨리 뛸 수 없음에도 걷거나 달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누군가 수신인을 딱히 염두에 두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중얼거리면 제일 먼저 엉덩이를 들썩였다. 손을 곧게 펴거나 오므릴 수 없었지만 무언가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서슴없이 펜을 집어들었다. 무엇보다 체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그들을 자기에게 우호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즐겼다.


<나뭇잎이 마르고>, 김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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