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비 Apr 22. 2021

서로 잡아당기는 힘

<0%를 향하여>, 서이제


예전에 어떤 독서모임에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 한국문학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 지를 경제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전 지구에서 단 하나의 나라만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창작해내는 것이 다름 아닌 문학임을,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중의 소수성을 띈 산업이고, 그래서 이 한국문학은 태생적으로 마이너 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한번 되짚어보니 막막한 것도 사실이었다. 개업 이래 늘 불황이라는 출판업계의 우스갯소리는 사실 자조였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왜 이렇게 자그마한가 고민을 하던 무렵,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영화를 좋아했다. 힘들고 가난할 걸 알지만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시나리오를 쓰고 싶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친구는 마음만은 이미 영화인이었다. 영화인이 되는데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 치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영화인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고 싶은 영화는 장르영화나 상업영화는 아니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누가 들어도 독립영화에 맞는, 예술성의 층위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더 어릴 적부터 영화를 꿈꾸던 다른 친구는 영상을 가르치던 선생님께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제 대학 붙었으니까 너는 네 작업만 하라고, 너는 할 수 있다고. 부탁이니 교직이수는 절대 하지 말라는 충고이자 당부였다. 곁길을 파두면 결국 그리로 가게 되고, 당신이 그랬으며 그에 대한 후회가 아직까지 응어리져있으니 너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내 친구들은 그런 말을 한다. 미술입시 성공하면 입시강사를 한다고. 다른 예술이라고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음악하는 친구들은 레슨비로 레슨비를 충당한다. 그러니까 두자릿수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그곳은 예술대라기 보다는 사범대처럼 보였다. 영화과는 영화교육과가 됐고 미술대학은 미술교육대학이 됐다. 아마 친구의 선생님께서도 비슷한 루트를 밟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관찰자이며 소비자이기 때문에 창작자 본인이 어떤 고뇌와 한계를 느끼는 지 잘은 모른다. 정말 쉽게 바라봐서 너는 영상을 잘하고, 너의 그림이 좋으며 너의 글이 널리 알려질 거라 믿는다. 그런데 이런 건 너무 순진하고 단순한 말인 것 같다. 당장의 의식주에 크게 중요하지 않는 산업이며, 그렇다보면 향유층이 좁아지고, 수요가 적으면 공급은 길을 잃는 게 당연한 순리였다. 그래서 점점, 인디밴드 공연도, 독립영화 상영도, 독립출판물도, 개인전시도 모두 지인 또는 그 업계 사람들이 와서 머릿수만 채워두는 꼴이 됐다. 늘 빈자리가 생기는 행사에 표값은 점점 깎여갔고, 제값이 인색하단 인상을 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책값에 불만을 표하고, 티켓값을 각종 할인이 붙는 멀티플렉스와 비교했다. 무명의 값은 비싸면 비싼대로, 싸면 싼대로 문제가 됐다. 



그렇게 지금 하고 싶은 사람도 많고 하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그걸 소비하는 사람은 없는, 공급과다와 수요과소의 세상이 됐다. 아무리 아등바등 해봐야 어차피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참 사기가 꺾인다. 그런데 그렇게 사기가 꺾일 걸 알면서도, 아니 이미 꺾였으면서도, 왜 혹자는 떠나지 않고 계속 예술을 하는가. 중력 때문이지 않을까. 셈할 수도 논할 수도 없지만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중력. 예술 그 자체가 가진 중력이 특정 인물들을 계속 끌어당기고, 그렇게 당겨진 이들은 하는 수 없이 계속하게 된다. 이 괴이한 중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말 한끗의 관심만 더해져도 그저 사그라드는 메시지를 다시 잡을 수 있을 텐데. 이런 씁쓸한 생각을 되뇐 <0%를 향아여>였다.







인디스페이스가 광화문으로 이전해 재개관했을 때부터 이곳에서 영화를 봤다. 독립영화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어쩌다보니 어쩌다가 자주 오게 되었다. 동기의 영화를 보러, 선배나 후배의 영화를 보러, 다른 대학 친구들의 영화를 보러, 건너 알게 된 지인이나 어쩌다가 알게 된 지인의 영화를 보러, 건너 알게 된 사람의 영화를 보러, 누군가는 '자기들끼리' 찍고 '자기들끼리' 보고 '자기들끼리' 해먹는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자기들끼리'라도 안 보면, 정말로 독립영화를 봐 줄 사람이 없었다.


/


로그라인.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말로 할 수 있었다면 말로 했지. 구태여 영화로 말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한마디로 될 일이었으면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되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늘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로 요약되기를 거부하는 말이었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어째서 이야기를 그렇게 써야 하냐고 반문하는 이야기였는데, 그러나 나는 거부할 수도 반문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학생에게 전통적인 플롯엥 대해, 극적 개연성에 대해, 명확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토스와 카타르시스. 주인공을 불행하게 만들고, 주인공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으라고 했다. 주인공을 죽고 싶게 만들고, 죽을 수 없게 하라고 했다. 뭐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주인공은 옆집 애를 구하러 갈 때도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유가 없으면 옆집 애를 구할 수 없었다. 주인공에게는 애를 잃은 경험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애가 또 죽어야 했다. 


<0%를 위하여>, 서이제





작가의 이전글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프로필을 맞게 설정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