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하늘이 도우면 가능합니다
책을 내야겠다 생각한 건 언제였더라, 글을 쓰는 것과 책을 내는 건 아예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내 글에 물성이 깃들길 그다지 바라지 않았다. 주위의 명필 친구들은 사람을 모아 에세이집을 냈고, 그런 건 우와! 싶었지만 역시 뭔가 해보고 싶진 않았달까.
그러다가 책에 빠져서 글을 부단히 쓰고, 서점의 단골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 하루에 글쓰기와 책 읽기가 없던 날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그 두 가지가 세수나 양치쯤 되는 습관이 됐을 때,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났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100일 글쓰기 챌린지를 완수했다. 그 챌린지에 성공한 사람 중 일부를 선별해 출간하는 이벤트도 있었는데 거기에 응모했으나 떨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일주일에 한 번씩 용두사미를 오락가락했던 그 100일 글쓰기가 책으로 나왔다면 천만년의 흑역사가 되었겠지 싶다. 아무튼, 그 출간 기회는 놓쳤지만 다른 마음이 싹텄다. 아, 이런 글도 출간할 수 있겠구나.
머릿속에 '내 책 마련'이란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몰아치는 전공 21학점과 연이어 들이닥친 인턴십에 묻혔고, '언젠간 해야지' 하는 거창하게 말하면 일생일대의 과업,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버킷리스트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어떤 독립서점에서 주최하는 책 만들기 클래스 공고를 봤다. 그 역시 충동적으로 가입했는데, 뭐랄까 무려 책을 만드는데 참가비도 없고, 원고 샘플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어딘가 수상했다. 역시나, 책을 직접 만들어 출간하는 것이 아닌 책 만드는 과정을 알려주는 그저 클래스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클래스가 자꾸 나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독립출판물을 제작할 때, 아무리 저렴하게 만든다고 해도 최소 150만 원가량 든다고 한다. 이 가격은 정말 '최소'일뿐이었고, 내가 원하는 어떤 것들을 추가하다 보면 오억은 금방 찍을 거 같았다. 적지 않은 가격에 충격받고 브런치를 뒤적거렸다. 그럼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독립출판물의 작가는 다 150만 원이 있는 건가? 놀랍게도 그런 거 같더라. 그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책은 약 2년이면 원금이 회수된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럼 대체 2년 동안 그 많은 책을 다 어디에 보관할 건지? 책 한 권을 만드는 일이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지? 정말 무수한 현실적인 고민이 들었는데 그중 가장 지배적인 건 '내 원고가 진짜 이 정도 값어치를 해?'라는 자기 검열이었다. 안 그래도 자기소개서며 포트폴리오며 자기 검열할 순간이 널리고 널린 취업준비생에게 새로운 검열 카테고리는 정말 끝내주게 피로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냉큼 포기했다.
최저시급이나 받는 취업준비생에게 내 책 마련은 레전드 사치라고 판단했으니까.
그런 일은 조금 더 뒤에, 150만 원과 2년쯤은 기꺼이 쓸 수 있는 때가 오면 하리라고 다짐하고 쿨하게 보내줬다. 돈 앞에서 이리도 뒤끝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독립출판물 제작사업 공고가 또 눈에 걸렸다. 도대체 포기하려고 하면 자꾸 눈에 걸리는 건 왜 그러는 걸까? 온 우주가 나의 내 책 마련을 돕는 걸까? 아니 사실은 희망 고문일지도.
인턴십 종료 후 끝내주게 찝찝한 백수생활을 연명하다가 본 공고라서, 그냥 칸은 채워서 제출했다. 지난 책 만들기 클래스 때 써본 기획서나 만들어본 샘플원고가 꽤 도움이 됐다. 인생이 아무리 기쁘든 또 아무리 힘들든 매일 같이 써온 블로그 일기도 한 몫했다. 순식간에 지원서를 완성할 수 있었고, 큰 기대 없이 제출했다.
개뿔 사실 개같이 기대했다. 매일같이 메일 창 새로고침 하는 게 일과였다. 면접 안내 메일이 왔을 때는 내 원고를 어떻게 설득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도 했다. 확신이 없었을 뿐, 자신은 충분했다. 난 자꾸 내 책이 누군가에겐 꼭 필요할 거 같았고, 잘 될 거 같았고, 아니더라도 딱 찍어낸 만큼은 다 팔릴 거 같았다. 나 자신을 말로 풀었고, 정작 면접 때 묻지도 않은 내 콘텐츠의 경쟁력을 열심히 내뱉었다.
그리고 내일은 사업자 등록증을 만들러 간다.
진짜 내 책이 생긴다.
이젠 돈도 없고 글도 없지만 책을 만든,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개쩌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과정도 분명 누군가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브런치에 기록한다.
부디 나무 아깝지 않은 책을 만들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