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효신 Mar 05. 2024

6년 만의 베를린

2015년 3월 20일, 나는 처음 독일에 왔다.


지나서 생각해 보니 나는 무언갈 그리는 걸 참 좋아했다. 십 대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 방문을 닫고 매일매일, 그림을 아주 오래오래 그렸다. 그리는 동안 점점 잔잔한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가 맞이하는 온전한 집중은 완전한 평온이었고 내 전부의 세계 같았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내 방 벽에 이리저리 배치해 보며 알맞은 장소를 찾는 일도 꽤나 행복했다. 차곡차곡 나의 그림들이 쌓이고 방은 알록달록해져 갔다. 그때 당시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내가 느꼈던 감동과 아름다움을 꺼내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런 마음은 점차 소멸되어 사라져 갔다. 전체 인생에서 모든 불행을 한꺼번에 때려 맞은 것처럼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꽤나 자주 반복되던 불가피한 좌절과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짙은 무기력과 우울을 동반했다. 소화되지 않은 체한 감정들은 그림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배설물이 다른 이에게는 정제되지 않은 재능으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몇몇 분들의 추천과 권유로 미대를 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남들의 기대는 왜곡된 자만으로 변질되고 오히려 마음속에 불안이 자라고 있었다. 부담감에 예전과 같이 그림 하나를 끝낼 수 없었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한예종 시험만 3번을 봤다. 희한하게 다 1차만 붙었었고. 

나는 뭔가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어느 순간 그냥 포기했다. 마음이 많이 아팠던 건데 그것도 모르고. 


그러다 어쩌다 부유하듯 자연스럽게_ 갑자기 베를린에 오게 되었다. 독일에 오래 사시던 고모와 갑자기 연락이 되어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이 쉽게 결정되었다. 원래 직업 특성상 유럽 다른 국가에 왔다 갔다 머무셔서 연락도 어렵고 베를린에도 오래 안 계시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는 독일로 오게 되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나의 첫 도시. 베를린.

A, B, C (아베쩨)부터 독일어를 처음 배웠다. 버스를 타다가 중간에 공사 때문에 정거장이 변경된다는 것을 못 알아 들어서 종점까지 가서 내려 어리둥절 길을 헤맸었고, 화장실이 어디냐는 질문의 문장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반복해서 연습한 다음 용기 내서 물어봤는데 아래층에 있다는 답변을 못 알아들어서 오른쪽 코너로 돌아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우왕좌왕한 웃픈 순간들이 참 많았다. 불확실한 미래에 무지 많이 불안해했고 돈 아끼겠다고 하루에 1-2시간 내리 걸었던 거리들, 유통기한 임박 50% 할인 샌드위치에 배탈도 자주 나고 짠내 나는 시간들도 많았지만 나는 이곳에서 매일매일 6-7시간 넘게 온전히 집중하며 그림을 끝낼 수 있는 힘을 다시금 얻었다. 학교를 합격하고 2017년도 9월, 나는 베를린을 떠났다.


지나고 나야지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베를린으로 오고 나서 모든 것을 덮칠 듯한 폭풍과도 같은 파도가 인생에서 아주 천천히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는 걸.



6년 만에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 안,

학교를 합격하고 다른 미대와 달리 우리 학교는 비교적 높은 어학 점수를 요구했기에 1년 입학 유예를 했었다. 베를린을 떠나기 모든 짐은 베를린의 창고센터에 맡겨놓았는데 2018년도에 다시 독일로 돌아와 새로운 도시에 자리를 잡고, 입학하기 전 베를린에 가서 창고에 있는 모든 짐을 다시 쌌다. 무려 8개의 무거운 박스를 택배로 부쳤다. 창고센터와 짐 부치는 곳이 아주 가깝지는 않아서 왔다 갔다 땀을 삐질 흘리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렇게 진절머리 나게 모든 힘을 소진하고 탈진한듯 베를린을 떠났다. 


어쩌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나버린 것일까?

잠도 많이 못 자고 나왔는데 잠은 전혀 오지 않고 미묘한 울렁거리는 마음에 작은 수첩을 꺼낸다.



요즘 그리고 싶은 것들, 몇 달 동안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둥둥 떠다녔던 것들을 끄적여본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에서 해가 일어나고 지는 모습, 미세한 빛의 조각들이 물결에 내려앉는 그림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hyoshin.park_ 2024.01.16

이 테마로는 이렇게 작은 조각의 그림을 많이 그리지 않을까 싶다.


R.S.V.P Papier in Mitte in Berlin

2박 3일의 짧은 베를린 여행이긴 했지만, 놀랄 정도로 사진이 거의 없다. 2월 말의 베를린은 프랑크푸르트보다 추웠고 흐렸다. 옷을 잔뜩 여미고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거리를 걸었었다. 두 번째 날에는 2개의 문구점을 들렸는데 기대했던 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R.S.V.P Papier in Mitte에는 모든 카드나 노트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종이에 쓰여 있었는데 그게 되게 좋았다. 나는 문구류에 진심이고 사랑하기에 나중에 시즌제로 상점을 열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Nibs Cacao in Berlin

여긴 Nibs Cacao라는 스페인 츄러스 집. 스페인을 안 가봐서 원래 본토 맛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저 그랬거든.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자주 먹던 츄러스와 굉장히 다른 것에 의의를 두는 것으로...

Nibs Cacao in Berlin

 츄러스는 안 찍고 빨간 테이블 위에 꽃만 찍었다. (킹받네)


Hamburger Bahnhof 미술관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를 다니던 기차역으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뮤지엄이 된 함부르크 반호프 뮤지움.

이우환 작가의 회고전을 보러 다녀왔다. 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보기를 너무 잘했다. 정말 좋았는데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글로 정리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파란색의 전시도록도 사서 나왔다. 



이튿날 저녁, 밥 먹으러 가는데 새들이 무리를 지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함께 날아다녔다.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 일사불란하게 다양한 모양으로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초록색으로 바뀐지도 모르고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의 합동 훈련인가? 웃기게도 베를린에서 제일 기억에 남은 장면. 



다음 날 일해야 해서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오후 한 시 티켓.

마지막 날은 11시쯤 체크 아웃 후, 따뜻한 쌀국수 한 그릇 먹고 베를린 중앙역으로 갔다. 남은 시간 동안 기차에서 읽을 잡지를 사고 도넛과 커피도 샀다. 기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내내 우중충하고 흐렸던 날씨에서 해가 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창가의 빛은 기차 안에 가득하다. '당신의 반신욕을 위한 6가지 완벽한 길잡이' 잡지의 글자들도 빛이 난다. 

 

 베를린을 생각할 때면 이상한 멜랑꼴리가 섞인 그리움이 잔재해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의 마음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부유하듯 떠돌이처럼 살다가 나도 모르게 이곳이 집이 되버린 것일까? 

keywo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