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99 시즌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시즌이었다. 바로 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FA컵 우승, 프리미어리그 우승,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1 시즌에 이뤄내는 트레블을 달성하였는데, 이는 당시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트레블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룬 이 세 개의 타이틀은 절대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손쉽게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직전 시즌인 1997-98 시즌, 데이비드 베컴, 스콜스, 긱스와 같은 유스 선수들 중심으로 세대교체를 한 맨유는 시즌 초반 무패행진을 달리며 좋은 페이스를 보여주나, 리그 후반부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며 아스널에게 승점 1점 차이로 아쉽게 리그 우승을 내주게 된다. 아쉬움이 남는 시즌이 지나가고, 퍼거슨 감독은 이를 공격과 수비, 양 측면 모두의 문제점이라고 인식하고 이를 둘 다 보강할 수 있는 이적시장 계획을 설계한다.
그리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97-98 시즌, 먼저 96-97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에릭 칸토나를 대체하는 새로운 스트라이커로 토트넘의 테디 셰링엄을 영입한다.
당시 테디 셰링엄의 4 시즌 간 토트넘에서의 스탯은 145경기 98골로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활약은 퍼거슨의 레이더망에 걸리기 쉬웠다. 또한 맨유는 중원 자원들도 정리하였는데, 국가대표팀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나 소속팀에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인 포보르스키와 팰리 스터를 이적시키고 드와이프 요크와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수비수인 야프 스탐, 그리고 미드필더 브롬크피스트를 영입하면서 맨유의 계획이었던 공격과 수비, 중원 모두 보강하였다.
프리미어리그.. 슬로 스타터 DNA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러한 전력 보강을 한 맨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시즌 처음부터 오히려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체리티 실드에서 전 시즌 우승을 내준 아스날에게 3-0으로 패배하였고, 리그컵에서는 8강에서 토트넘에게 덜미가 잡히게 된다.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 개막 후 3경기에서도 무승부를 기록하며, 팬들은 물론 많은 축구 전문가들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구성한 긱스, 베컴, 스콜스와 같은 어린 선수들로는 우승은커녕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며, 퍼거슨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dna는 '슬로 스타터(slow starter)'로 시즌 초반부터 무섭게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이다가 점점 상승세를 타는 것이다. 맨유의 1998-99 시즌 상승세의 기점은 라이벌 더비였다. 7라운드 잉글랜드의 희대의 라이벌 더비인 노스웨스트 더비에서 리버풀을 2-0으로 잡은 것을 시작으로 맨유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리그 후반부에 들어서 맨유의 경기력은 절정에 달하는데, 리그 막판 잔여 20경기에서 14승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거두고, 당시 우승 경쟁을 하던 아스널을 누르고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차지하게 된다.
긱스 인생골이 도운 FA컵 우승...
FA컵에서 맨유는 초반에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며, 팬들에게 우승을 기대하게 하였다. 3차 예선에서부터 8강전까지 리버풀, 첼시 등의 강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치면서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그러나 맨유에게는 4강전이 고비였다. 4강전 상대는 바로 지난 시즌 우승을 내주었으며 이번 시즌도 프리미어 리그 우승 경쟁을 하게 된 아스널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 경기에서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사실 이 경기에서 맨유는 전체적으로 아스날에게 밀리는 경기를 하였다. 대부분의 공격권을 아스널에게 내주고, 중원 싸움에서도 밀리는 분위기였다.
중원 싸움에서 밀리는 이유는 바로 후반에 나온 수적 열세에서 나왔다. 선제골은 맨유가 먼저 넣었으나 , 베르캄프가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설상가상으로 맨유의 로이 킨이 후반 74분 경고 누적으로 퇴장하였다. 이후부터 아스널은 맨유의 빈약한 중원을 틈타 공세를 퍼부었고, 90분 아스널의 로비 파울러 선수가 필 네빌의 깊은 태클을 받고 페널티킥을 얻어 낸다. 그러나 여기서 피터 슈마이켈은 베르캄프의 페널티킥을 선방하며, 위기를 모면하였고, 연장 109분 라이언 긱스의 그림 같은 솔로 골(solo goal)로 맨유는 아스널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다.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을 상대하게 되는데, 또 하나의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경기 시작 5분 만에 이번에도 맨유의 미드필더이자 주장인 로이 킨이 컨디션에 이상을 느끼게 되고, 여기서 퍼거슨 감독의 선택은 미드필더 수를 줄이고 최전방 스트라이커 한 명을 더 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퍼거슨의 유연한 전술은 바로 효과를 발휘하였다. 교체 투입된 테디 셰링엄이 6분 만에 폴 스콜스와의 원투 패스 이후 선제골을 성공시켜 분위기를 가져갔고,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얻은 맨유는 폴 스콜스의 추가골에 힙입어 결승전에서 뉴캐슬을 누르고 fa컵 우승에 차지하게 된다.
캄프 누의 기적이라 불리는 98-99 시즌 챔피언스 리그..
98-99 시즌 챔피언스 리그는 이미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캄프 누의 기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로 챔스 결승전이 열리는 캄프 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극적으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승리하며,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사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챔스 우승으로의 길은 결승전만 고난을 겪은 것이다. 98-99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유는 유럽 최고의 팀이라 할 수 있는 뮌헨과 바르샤와 같은 조에 속하면서 죽음의 조를 이루며, 조별 예선부터 고난 길을 예고하였다.
조별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바르샤를 상대로 1차전, 2차전 모두 3-3으로 무승부를 거두었으며,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는 1차전 2-2 무승부, 그리고 2차전에서는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유럽 최강팀들 사이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상대적 약체팀인 브뢴비를 상대로는 1차전 6-2 , 2차전 5-0 대승을 거두면서 효율적으로 조별리그 경기들을 운영하였다. 결과적으로 맨유는 바이에른 뮌헨에 이은 2위를 기록하며, 당시 유럽 최강팀인 바르셀로나를 누르고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토너먼트가 시작되는 8강전, 상대는 브라질의 천재 공격수 호나우두와 이탈리아 국민이 사랑한 공격형 미드필더 로베르토 바지오가 있는 인테르였다. 그러나 당시 인테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넘지 못하였다. 8강전, 맨유는 인테르와의 1차전 홈경기에서 요크의 멀티 헤딩골에 힘입어 2-0으로 인테르를 꺾었다. 2차전에서 맨유는 교체 투입된 인테르의 벤톨라에게 실점을 하면서 상대에게 추격의 여지를 허용하였으나 88분 스콜스가 동점골을 넣으면서 합산 스코어 3-1로 승리하며 4강전에 진출한다. 이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경기 막판에 마법을 부리며 승리를 챙기는 경기들이 많아졌다.
4강전에서는 유벤투스를 상대하게 되는데, 1차전 유벤투스의 콘테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였으나 긱스의 막판 동점골로 1-1 무승부로 끝난다. 그리고 2차전에서 맨유는 기적 같은 경기를 펼치는데, 경기 시작 10분 만에 유벤투스의 공격수 인자기에게 두골을 주지만, 요크와 킨의 헤딩골로 전반전을 2-2로 끝낸다. 그러나 후반전 맨유는 역전을 위해 총공격을 펼치지만, 유벤투스의 뛰어난 수비력을 뚫지 못하고 고전하였다. 이때 맨유가 또 한 번 마법을 부렸다. 경기 종료 7분 전 요크가 끌고 가던 공을 유벤투스 골키퍼가 쳐내고 흘러나온 볼을 엔디 콜이 골로 연결하면서 맨유는 극적으로 대망의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대망의 결승전.. 상대는 조별리그에서 한조로 묶이면서 1차전, 2차전 모두 무승부를 거둔 바이에른 뮌헨 이어 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당시 베테랑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어린 유스 출신 선수들로 팀을 구성하였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는 뮌헨과 맨유의 결승전을 '신세대와 구세대의 대결'이라고 조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맨유는 당시 폴 스콜스와 로이 킨이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참여할 수 없으면서 베스트 11을 구축할 수 없었다. 중원에서 큰 전력 누수가 발생한 맨유는 오른쪽 측면에서 뛰던 데이비드 베컴을 중앙으로 내려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부여하였으며, 기존의 베컴 자리에 라이언 긱스를 투입하여 직선적인 돌파와 크로스를 주문하였다. 그러면서 기존의 라이언 긱스 자리인 왼쪽 측면에는 블롬크비스트, 로이 킨 자리에는 니키 버트를 투입하면서 최대한 로이 킨과 스콜스의 이탈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뮌헨과의 경기는 정말 강팀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준 경기였다. 맨유는 경기 내내 스콜스와 로이 킨의 이탈로, 예상대로 바이에른 뮌헨과의 중원 싸움에서 다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고, 바이에른 뮌헨에게 공격권을 허용하였다. 그러던 중 뮌헨의 바슬러가 프리킥 골로 선제골을 뽑으면서 경기의 분위기
또한 완전히 뮌헨 쪽으로 넘어갔다. 선제골을 넣은 뮌헨은 이후에도 두 번이나 골대를 맞히는 등 파상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경기는 후반 뮌헨의 베테랑 수비수인 마테우스와 공격수 바슬러가 교체되면서 뒤바뀌게 된다. 마테우스라는 핵심 수비자원이 교체되고 난 후 뮌헨의 수비진에서는 점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맨유는 이를 알아채고 경기 내내 아쉬운 결정력을 보여준 드와이트 요크와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던 블롬크 피스트를 빼고, 테디 세링엄과 숄샤르를 투입하면서 공격에 힘을 실었다.
결과적으로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용병술은 정확했고 맨유의 마법은 결승전에서 다시 한번 나왔다. 후반 91분, 추가시간에 극적으로 테디 셰링엄이 긱스가 슈팅한 볼의 방향을 감각적으로 돌려놓으면서 동점골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경기 종료 약 10초 전 정규시간이 지난 93분에 베컴이 처리한 코너킥을 테디 셰링엄이 헤딩으로 돌려놓았고, 이 볼을 솔샤르가 위로 솟아오르는 골로 연결시키면서 맨유는 극적으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98-99 시즌 맨유의 트레블의 주역은 알렉스 퍼거슨과 그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유스 출신들의 선수들의 활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앞서 언급하였듯이 1998-99 시즌 시작 전 여러 축구 전문가와 언론에서 맨유는 유스 출신의 어린 선수들 가지고는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챔스 우승은커녕 리그 우승도 어렵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퍼거슨과 그의 아이들은 패기 있는 모습과 후반 막판까지 지치지 않는 열정을 보이며, 보란 듯이 언론의 비관적 예상을 뒤집었다.
또한 맨유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잉글랜드 축구계에서도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게 되는데, 맨유의 유럽 대항전 우승 타이틀은 잉글랜드의 헤이젤 참사 사건 이후 14년 만이기 때문이다.
헤이젤 참사 사건은 잉글랜드 축구 리그의 위상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영어 발음으로)에 위치한 스타드 루아 보두앵에서 일어난 훌리건 난동으로 인한 혼란에 구조물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많은 사상자가 나온 만큼 UEFA에서는 리버풀에게 7년간 유럽 대항전 및 국제대회 출전 정지와 잉글랜드 클럽들에 대해서는 5년간의 유럽 대항전 및 국제대회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헤이젤 참사와 관련된 정보는 리버풀의 역사 편에서 더욱 심도 있게 다루겠다.)
이로 인하여 잉글랜드 리그의 위상은 uefa리그 순위 28위로 완전히 떨어졌으나, 퍼거슨의 맨유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리그 순위는 다시 3위로 격상하였다. 즉 퍼거슨의 맨유의 챔스 우승은 맨유라는 클럽을 단순히 유럽 정상으로 올려놓은 것이 아닌 잉글랜드 리그의 위상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이다.
1998-99 시즌, 20세기 끝에 이룬 트레블 이후에도 맨유는 꾸준히 리그에서는 아스널과 우승 다툼을 하며,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우승까지는 아니지만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트레블을 이룬 팀이 단순한 돌풍에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 맨유는 미국 글레이저 가문의 구단 인수와 같은 거대 자본의 유입,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첼시, 맨시티 등 신흥 강자의 등장으로 변화의 폭풍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