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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가 남긴 3가지 인생의 맛

살 맛, 죽을 맛, 쉼 맛

by 숲song 꽃song

살 맛 네 가족이 다시 뭉친 시간들

올 추석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시댁 식구들이 미리 모여 식사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기에 추석 당일에는 따로 모이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홀가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연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참에 이직을 준비하는 아들과 바쁜 직장생활로 지쳐 있는 딸에게 잠시 쉬어갈 여유를 주고 싶었다. 딸은 전주, 아들은 서울, 우리 부부는 장수에 살고 있다. 각자 흩어져 사는 가족이 한날 한자리에 모이기란 쉽지 않다. 긴 연휴가 아니면 얼굴 보기조차 어려운 게 요즘 현실이다. 모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아들, 딸과 함께 대천 바닷가로 1박 2일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첫날, 전주에서 합류한 우리 가족은 보령시내의 영화관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함께 보고, 가을바람을 맞으며 대천 해변을 거닐었다. 저녁엔 딸이 자신 있게 고른 조개구이집에서 낮에 본 영화 이야기와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했다.

즐거운 대화와 술 한 잔에 기분이 한껏 달아올라 밤바다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죽 소리마저 우리를 위해 준비된 축제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아들이 준비해 온 와인을 마시며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바빴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시 네 가족이 함께 살던 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둘째 날, 해물칼국수로 간단히 해장하고 대천에서 멀지 않은 안면도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아이들과 어릴 적 함께 왔던 추억의 장소였다. 울창한 소나무숲, 새로 생긴 스카이워크길을 걸으며 '따로 또 같이' 자기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가 또 함께하는 세상으로 나오기도 하며 숲의 향기와 편안함을 즐겼다. 함께 다양한 숲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틈만 나면 자연 속에서 함께 노닐었던 옛 추억들이 소환되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온기가 되살아났다.

짧지만 충분히 행복했던, 살 맛 나는 1박 2일이었다.




죽을 맛 명절날 들이닥친 뜻밖의 사고


하지만 인생이 언제나 살맛으로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죽을 맛'이 불쑥 찾아와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간단하게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추석 전날 저녁, 두툼한 갈비찜을 한입 베어 물던 남편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살코기만 있는 줄 알고 덥석 물었다가 뼈를 깨무는 바람에 예전에 때운 앞니 일부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제일 눈에 띄는 앞니였다. 연휴라 치과는 문을 닫았고, 남편은 난감한 얼굴로 거울만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미안했고, 친정에 함께 가기로 한 계획도 어그러졌다.


결국 추석 다음날, 나 혼자 친정에 다녀오기로 하고 아침 일찍 차에 시동을 걸었다. 막 출발하기 직전, 뒷좌석 가방에 둔 휴대폰을 꺼내오려고 잠시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여는 찰나, 차가 스르르 앞으로 움직이더니 내 오른쪽 발가락을 덮쳤다. 순식간이었다. 평지이고 마당 끝에 주차되어 있으니, 잠깐 사이에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하고 드라이브상태인 채로 내렸던 것이다. 무슨 사달이 나려면 꼭 이렇게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차바퀴는 내 발가락 위로 올라타면서 정지되었고 바퀴에 깔린 발가락은 점점 압박감이 커지면서 고통스러웠다.

여보! …

난생처음, 겁에 질려 목이 터져라 남편이 있는 거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창문을 닫은 채 안에 있던 남편은 한참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고양이 '둥이'만 내 외침에 '야옹'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오른발은 바퀴 밑에 깔려 꼼짝할 수 없고, 핸드폰은 손이 닿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어림 없을 테지만 혼자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두 손으로 차를 들어 올리려다가 힘도 못쓰고 그만 허리가 '꿈벅'했다.

한참 만에야 소리를 듣고 달려온 남편이 차를 뒤로 물러 발을 빼냈지만, 이젠 허리를 펴기가 힘들었다. 부러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발가락은 천만다행으로 멀쩡했고, 피맺힘도 없이 살갗만 조금 벗겨져 있었다. 차량 무게를 한참 버텨냈기에 종일 얼얼하고 둔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병원도 문을 닫은 명절, 결국 파스와 찜질팩에 의지해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친정엄마와 여동생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종일 침대에 누워 자다 깨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누운 채로 다시 생각해 봐도 아침에 일어난 일들이 믿을 수 없는 꿈같기도 하고, 아찔하기도 하면서 속상한 마음에 울컥울컥 눈물이 났다.





쉼맛 멈추자 비로소 보인 것들


깊은 밤이 되어서야 마음이 가라앉으며 문득 ‘오늘처럼 낮에 드러누워 쉬어 본 적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올 들어 처음 누워있었던 것 같은데 낯설고 묘한 평화가 느껴졌던 것도 같다. 남은 연휴까지 알차게 보내려던 계획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자, 허리는 아팠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은퇴 후, 지난 3년을 되돌아보니, 내게 남은 시간들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들로 채우려는 욕심에 직장에 다닐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쉬지 않고 열심히 살려고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오랜 세월 동안 늘 뭔가를 해야만 가치 있다고 믿었던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낯설고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하는 일을 멈추니, 몸이 쉬게 되고 마음도 따라 쉬었다. 그리고 쉼 속에서 비로소 나를 돌아보는 눈이 떠졌다.

안면도 휴양림 '산림 문화관'에 있는 나비표본

긴 추석 연휴 속에서도 인생의 맛은 참 다채로웠다.
오랜만에 딸, 아들과 함께한 ‘살맛’, 예기치 못한 사고로 느낀 ‘죽을 맛’,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내려놓으며 깨달은 ‘쉼맛’까지.

인생이란 이처럼 내게 다가오는 다채로운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웃고 울고 쉬기도 하면서 다시 한 걸음씩 내딛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오마이 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https://omn.kr/2fk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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