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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득 Mar 10. 2021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순간까지

작심과 미루기 사이에서

예전에 안다 형, 그러니까 무엇이든 다 안다는, 안다 형은 저랑 꼭 닮은 새가 있다면서 사막에 사는 새 이야기를 했어요.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이고 또 제 기억력이 날이 갈수록 허약해져 어느 사막인지 무슨 새인지는 다 잊었습니다. 다만 그 새의 별명은 기억하는데 ‘작심 새’라고 해요. 사막에는 일교차가 크고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새는 바위틈에 몸을 웅크리고 밤새 덜덜 떨면서 다짐해요. 내일 아침에는 꼭 둥지를 지을 거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둥지부터 지을 거라고. 날이 밝도록 늦잠을 잔 새는 일어나자마자 둥지를 지어야 하겠지만 다른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 둥지 짓는 일은 잠시 나중으로 미룹니다. 나중에, 다음에, 좀 있다, 언제 봐서. 그렇게 해가 지고 다시 밤이 오고 저를 꼭 닮은 새는 추위에 떨면서 밤을 새운다고 해요.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기필코 둥지를 지을 거라고 작심하면서 말이죠. 미루기와 작심에 대해 쓴 글을 아래에 붙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느는 것은 주름과 뱃살과 나쁜 습관이다. 내가 가진 버릇 가운데 가장 고약한 것은 무조건 미루는 습관일 것이다. 그러니 마감도 번번이 어긴다. 고작 일주일에 200자 원고지 6장 분량의 칼럼을 쓰면서 매번 마감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다. 나는 일단 미룬다. 미루고 또 미룬다. 미룰 수만 있다면 온갖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서 구실과 핑계를 만든다.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순간까지 미룬다. 결국, 마침내, 드디어 몇 번이나 어긴 마감이 코앞에 칼끝을 들이댈 때가 되어야 겨우 마지못해 첫 문장을 쓴다. 무조건 미루는 것이 망치로 두들겨 맞아야 할 ‘못’된 습관이란 걸 알면서 여태 고치지 못하는 것도 바로 무조건 미루는 고약한 버릇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처럼 의지가 강할 것 같은 사람도 자주 마감을 어겼다든지, <공산당선언>도 ‘공산주의자동맹’의 런던 지도자들로부터 그 작업에서 손을 떼라는 비장한 최후통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책상에 앉았다든지, 그러니까 움베르토 에코가 “그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처럼 가공할 만한 고막의 울림과 함께 시작된다”라고 찬사를 보낸 <공산당선언>의 첫 문장이 사실은 마감 독촉에 쫓겨서 허겁지겁 나온 것이라든지, 그래서 지금도 마감을 넘긴 하나의 유령이 허둥지둥 유럽을 떠돌고 있다든지 하는 소리들이 은근히 위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마감이 어제였는데 아직 첫 문장도 쓰지 못한 내 처지에는.


Photo by Sonder Quest on Unsplash


의지박약자는 새해를 맞아 작심한다. 새해에 나갈 첫 칼럼부터는 미루지 않고 미리 준비해서 여유롭게 보내겠다고. 무조건 미루는 나쁜 버릇을 고치겠다고. 늦어도 하루 전에는 초고를 완성하겠다고.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하겠다고. 그러니까 날마다 원고지 한 장씩 쓰겠다고. 그것이 너무 기계적이라면 처음 이틀 동안은 무얼 쓸 건지 대략 소재를 정하고, 다음 이틀 동안 어떤 식으로 풀어갈 건지 방향을 정하고, 5일째 되는 날 초고를 쓰고, 남은 이틀 동안 고치고 다듬겠다고. 의지박약자는 주먹을 꼭 쥐고 작심한다.


그렇게 작심한 것이 이번 칼럼을 쓰기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랬는데 엿새 동안 그저 시간만 보냈다. 시간이 남아서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잡담을 하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를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면서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이 처치 곤란한 시간을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면서 소재도 방향도 정하지 않고 단 한 문장도 쓰지 않고 일주일을 다 보냈다. 가끔 노트북 앞에 앉기는 했다. 글을 쓰려고 워드 파일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 온갖 시시한 인터넷 뉴스만 뒤지면서 시간을 다 보낸다.


 새해부터는 이 나쁜 버릇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기필코, 꼭 고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다짐만 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이 3년은 된 것 같아요. 사막에 사는 새처럼 날마다 작심과 미루기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변하는 시간을 지나며 여기까지 왔네요. 그런 제 모습이 스스로도 어리석고 한심하고 답답합니다. 그래도 절망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어느새 '글쓰기 준비의 기술'이라는 주제로 여덟 꼭지의 글을 발행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대부분 이미 쓴 글을 다듬고 정리하는 수준이지만요. 작심의 심정은 무겁고 비장하지만 미루는 마음은 한없이 가볍고 관대합니다. 그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 비장함과 관대함 사이 어디쯤에서 글쓰기는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 나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부디 제 글쓰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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