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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득 Mar 30. 2021

에세이란 무엇인가?

정의의 기술

다나카 히로노부가 쓴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이란 책에 보면, 정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글을 쓸 때 자기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며,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에세이를 "사상(事象)과 심상(心象)이 교차하는 곳에 생긴 문장"이라고 정의합니다. '사상'은 세상의 모든 물체, 사건, 사람이며, 그 사상을 접하고 마음이 움직여서 쓰고 싶은 기분이 생겨나는 것을 '심상'이라고 한다면서 말이죠. 정말 멋진 정의지요.

저는 에세이를 제법 많이 썼지만 에세이를 정의해 보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한번 에세이를 정의해 보고 싶었어요. 다나카 히로노부 씨처럼 근사한 정의는 아닙니다만. 어떤 단어에 대해 자신만의 고유한 정의를 만들어보는 것은 그 자체로 괜찮은 글쓰기 준비의 기술 같습니다.

    


에세이는 '돌아쓰는' 글이다


만일 누군가 내게 에세이를 한번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에세이는 돌아쓰는 글이다”라고 답하겠다. “돌아쓰다”라는 말은 없는 말이다. “쓰다”라는 말 앞에 “돌아”라는 말을 붙여 새로 만든 말이니까. “돌아”는 돌아보다, 돌아다니다, 돌아가다, 돌아서다, 돌아오다 라고 할 때의 “돌아”이며, 그것들을 모두 담고 있는 ‘돌아’이다. 에세이는 무엇을 쓰든 돌아보고, 돌아다니고, 돌아가고, 돌아서고 마침내 돌아오는 글이 아닐까.


우선 에세이는 돌아보며 쓰는 글이다. 사실 모든 글쓰기는 관찰과 성찰이 수반되는 반성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점이 에세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이태준 선생은 이렇게 썼다.


“물이 ‘퍽 맑다’는 것과 ‘어찌 맑은지 돌 틈에 엎드린 고기들의 숨 쉬는 것까지 보인다’하는 것이 다르다. 한 사람은 얼른 바쁘게 보았고 한 사람은 오래 고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오래 고요하게 보는” 일이 돌아보는 일이다. 세계를 오래 살피는 것이 관찰이라면 나를 고요하게 돌아보는 것은 성찰이다.

성찰에는 후회가 따르고 후회에는 성찰이 따른다. 영화 <일대종사>에서 궁이(장쯔이)는 엽문(양조위)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후회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들 하지만… 후회가 없다면 인생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돌아보는 것, 후회는 궁가 64수 절예의 마지막 비기이다. 후회가 없다면 글에, 에세이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영화 <일대종사>


에세이는 돌아다니며 쓰는 글이다. 주로 일상 속에서 온갖 소재를 찾아 쓰는 글이므로 에세이는 세상을 산책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산책하는 정도의 느긋함과 가벼움과 리듬으로 쓰는 문장이다. 에세이의 호흡은 출근길 노동자의 걸음처럼 바쁘지 않고, 시위대의 행진처럼 격렬하거나 비장하지 않고, 만취한 자의 보행처럼 좌충우돌 비틀거리지도 않는다.

에세이는 목적지 없이 걷는 산책자의 자유롭고 느슨한 사유와 감각에 가깝다. 산책이란 눈이 가고 발길이 가고 거기에 마음이 따라가는 보행. 가다 머무는 것, 머물다 다시 가는 것, 그렇게 여기저기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마음의 산책.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에세이를 주로 출판하는 것도 그래서일까.


에세이는 돌아가며 쓰는 글이다. 우회와 지연의 글이며, 에포케, 판단 유보의 문장이다. 직진과 과속의 정신이 아니라 일단 좀 더 두고 보자는 ‘우선 멈춤’과 감속의 사유다. 에세이에 일화나 에피소드가 많은 이유 역시 그것이 돌아가는 글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카프카와 현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하시딤 마을의 초라한 주막 안에 안식일 저녁 무렵 유대인들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은 그 고장 뜨내기로서 매우 남루한 차림을 하고 구석의 어두컴컴한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때 한 사람이 제안하기를 만일 각자 한 가지씩 소원이 허락된다면 무엇을 바라는지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사위를, 어떤 사람은 목수 작업대를 갖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빙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자기 소원을 이야기하고 나자 어두운 구석에 있는 걸인 한 명만 남게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머뭇거리며 사람들 질문에 대답했다. “난 내가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 되었으면 싶소. 그리하여 넓은 땅덩어리를 통치하면서 밤이 되면 누워 내 궁전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국경을 넘어 적들이 침입해 와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기마병들이 내 성 앞까지 쳐들어왔는데도 아무런 저항도 없고, 나는 잠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 옷을 입을 시간도 없이, 단지 내의 바람으로 도주 길에 올라야 했고, 산을 넘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고 숲과 언덕을 넘으면서 쉼 없이 밤낮으로 쫓기다가 결국 여기 당신네들 마을의 한 벤치 위까지 안전하게 도착했으면 하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외다.”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 “그러면 당신은 그런 소원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라고 한 사람이 물었다. – “내의 한 벌이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 이야기는 카프카의 세계가 운영되는 체계 깊숙이 우리를 이끌어간다.”


에세이는 돌아서며 쓰는 글이다. 의심하고 회의하는 글이다.

앞에서 성찰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성찰’의 성은 살필 성(省)으로 적을 소(少)와 눈 목(目)이 합쳐진 회의문자다. 적을 소(少)는 ‘작다’라는 뜻도 있어 작은 것까지 자세히 본다고 해서 거기서 ‘살피다’라는 뜻이 나온 것. 그러나 그저 오래 자세히 본다고 성찰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성찰은 눈을 작게 해서 세계와 자신을 째려보는 것일 수 있다. 성찰에는 가차 없는 비판적 시각이 요구된다. 성찰은 기존의 권위와 관습과 고정관념과 감성을 의심하고 어긋나고 배반하고 반발하는 행위다.

에세이를 성찰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단절하고 반전하고 전복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등을 돌리고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돌아오며 쓰는 글이다. 갔다가 돌아오는 글, 왕복의 글이다.

에스키모 인들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아무 말 없이 화가 풀릴 때까지 얼음 평원을 걷고 또 걷는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어 화가 다 풀리면 그때 비로소 멈춰 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 되돌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은 뉘우침과 이해와 용서의 길이라고 한다. 처음에 가는 길이야 화가 나 씩씩거리며 가는 것이니 얼마나 멀고 힘든 길인지 알 수 없었을 테지만, 화가 풀리고 마음이 진정된 다음 다시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멀고 하염없었을까.

에세이는 그런 글이다. 왕복하는 글쓰기.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글쓰기. 추상에서 구체로, 구체에서 다시 추상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안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다시 안으로. 자신에서 타자로, 타자에서 다시 자신으로. 그리고 그렇게 갔다 돌아온 추상은, 현재는, 안은, 자신은 전과 똑같은 것일 수 없다.


에세이는 '돌아쓰는' 글이다. 무엇을 쓰든 돌아보고, 돌아다니고, 돌아가고, 돌아서고 마침내 다시 돌아오는 글이 아닐까.




이번에는 운이 좋아 다행히 마감을 넘기지 않았습니다만, 지난번 말씀드린 것처럼 당분간  1 발행이 어렵습니다. 2주에 1 발행은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김상득 엎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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