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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득 May 21. 2021

조각보 글쓰기

자투리 글 이어 붙이기의 기술

예전에 '자투리들의 연대'라는 제목으로 조각보 글쓰기에 대해 쓴 적이 있어요. 그건 한 편의 온전한 글이 되기에는 너무 작은 자투리 글, 글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글쓰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모양과 색의 천 조각을 이어 붙이면 하나의 어엿한 보자기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실제로 자투리 글들을 이어 붙여보면 글의 조각들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글의 겹과 주름을 만듭니다. 


아래 붙이는 글 역시 그렇게 쓴 글입니다. 자투리 글, 글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 조각보 글쓰기의 한 예인 셈이죠.




마스크의 유령들


1.     어릴 때 동네에 용구라는 형이 있었다. 형은 문자 쓰기를 즐겼지만 가끔 틀린 단어를 썼다.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고 원래 낱말에서 살짝 어긋난 정도의 실수를 하곤 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신사임당을 신사명당이라고 한다든지 스컹크를 스핑크스라고 한다든지 하는. 평소 검소한 용구 형이 한 번은 바지에 새 벨트를 하고 있었다. 동생 용식이가 무슨 벨트냐고 묻자 형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게 바로 케이 마스크다. 케이 마스크!” 용구 형이 보여준 벨트 안쪽엔 케이에스 마크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2.     오늘 아침 <마스크의 유령들>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보았는데 사실은 자크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착각한 것이다. 어긋나게 읽은 것. 그러니까 이 오독은 용구 형의 ‘케이 마스크’인 셈이다. ‘마스크의 유령들’은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원래 유령은 “이음매가 어긋난” 틈에서 출몰하는 법. 그렇게 ‘마스크의 유령들’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3.     율라 비스는 <면역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바이러스는 정확히 무생물은 아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바이러스는 먹지 않고, 자라지 않고, 일반적으로 다른 생물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또 이렇게도 썼다. “바이러스는 좀비, 아니면 시체 도둑, 아니면 뱀파이어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유령이 아닌가.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어떤 것. 먹지 않고 자라지 않고 다른 생물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 어떤 것. 


4.     유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졌다가도 돌아온다. 돌아올 것이다. 바이러스가 돌아오듯이 마스크도 돌아올 것이다. 유령처럼.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유령의 출현으로 시작한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것, 이 사물 this thing은 끝내 도착할 것이다. 망령/되돌아오는 것은 올 것이다. 늦지 않게 올 것이다. 아무리 늦더라도 올 것이다.” 


Henry Fuseli, 'Hamlet and the Ghost', 1789


5.     지난해 3월 19일 나는 페북에 이렇게 썼다. “꿈을 꾸었다. 식당에서 곤드레밥을 먹고 있는데 밥 안에 뭔가 기이한 것, 그러니까 거기 있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 보여 젓가락으로 들어 올렸더니 일회용 검정 마스크가 나온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식당에서 일하는 분에게 말씀드리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면서 혹시 손님 마스크가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울컥해서 면 마스크를 쓴다고 살짝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러자 그분 역시 소리를 높이며 여기 주방에서 일하는 분들도 모두 면 마스크를 쓰는데 그렇다면 마스크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저것이 거기서 나온 것인지 참 미스터리 하다며 웃는다.” 


6.     하루에 전 세계적으로 버려지는 마스크의 수는 얼마나 될까? 지난 일 년 동안 버려진 마스크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그것들은 어느새 다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그러나 있다. 비가시성의 존재. 유령 같은. 그것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꿈으로 혹은 꿈이 아니라 실재의 사막으로. 기후 위기와 새로운 바이러스와 새로운 두려움으로. 


7.     침. 비말. 피나 정액이 아니라 침. “이 사람아, 자네 입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 맥베스를 흉내 내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내 가슴속에는 유령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소.”


8.     요즘처럼 이렇게 자주 손을 씻은 적이 없다. 손 씻기, 손 닦기라면 <리어 왕>의 대화, 그러니까 “오, 그 손에 입 맞추게 해 주오.” “닦기부터 합시다. 죽음의 냄새가 나니까.”라는 말들이 떠오르지만 맥베스 부인을 잊을 수 없겠다. 한 시간의 사분의 일 동안 손을 씻는 맥베스 부인. 깊은 잠에 빠져 걷는 몽유 상태로 걷고 손을 비벼대는 맥베스 부인은 유령 같지 않은가. 맥베스 부인처럼 손을 씻고 또 씻는 우리는. 


9.     열 체크. 밝혀라, 네 체온을. 네가 누군지 너의 온도가 말해줄 것이다. QR코드 인증. 혹은 방문기 적기. 끝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는 행위. 나는 누구인가. 식당에 가거나 도서관을 가는 일상적 행위를 할 때도 우리는 매번 신원을 밝히고 경계를,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마치 국경을 통과하는 것처럼. 두렵고 낯선 존재가 되어 혹은 낯익은 그러나 두려운 존재가 되어. 


10.  면역에서 신체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코와 입은 나라로 치면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공항이나 항구 같은 것.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는 것은 개인의 경계를 봉쇄하는 개인 단위의 국경 봉쇄. 


11.  2주간의 격리. 14일 혹은 보름. 보름달이 그믐이 되는 기간.


12.  마스크를 쓴 사람. 바이러스의 숙주인 인간. 인간이라는 유령.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과 접촉을 꺼리고 비대면, 비접촉, 비대화로 창백해진 우울해진 유령.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촉천민이구나.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러므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는 말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존재냐 비존재냐 이것이 질문이다. 이것이 대체 살아 있는 것이냐 살아 있지 못한 것인가 이것이 물음이다. 스스로의 결단을 촉구하는 외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묻는 두려워하는, 겁에 질린, 우울에 지친,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유령의 자문.  


13.  마스크를 쓴 우리는, 나는 유령 같다. 표정이 없는. 얼굴이 없는. 가오나시.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 나타난다. 얼굴은 사물과 달리 바라보고 호소하고 표현한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썼다. “얼굴은 열려 있고, 깊이를 얻으며, 열려 있음을 통해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 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 그 얼굴이 마스크로 가려진다. 코와 입이, 표정이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도 여전히 열려 있고 깊이를 얻으며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도 나에게 윤리적인 요청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을 환대할 수 있을까? 


14.  마스크를 쓴 누군가가 다가오면 피한다. 달아난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15.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그녀’라고 말했지만, 이 대명사는 인간이 발명한 가면 가운데 가장 소름 끼치는 가면의 하나다. 찰스에게 다가온 것은 하나의 대명사가 아니라 눈과 표정,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민첩한 걸음걸이, 그리고 잠든 얼굴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공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었고, 불행한 여인의 행복을 바라는 숭고하고 순수한 열망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마스크는 사라를 다시 ‘그녀’라는 대명사로 가리는 가면이 아닌가.   


16.  무증상 감염. 나는 내가 무섭다. 이렇게 건강하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든 너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공포, 두려움. 이 끝없는 죄의식. 이 죄의식의 신들림, 사로잡힘. 이것은 안톤 체호프의 <공포>에 나오는 문장처럼 “무서운 일 아닌가요? 그래, 이것이 유령보다 덜 무서운가요?”


17.  자크 데리다는 유령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한다. 그는 <햄릿>에 나오는 마셀러스의 대사를 인용하며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마무리한다. “자네는 학자야, 그것에게 말 걸어 봐, 호레이쇼.” 그러나 우리는, 학자도 아닌 우리는 말을 걸 수 있을까? 마스크를 쓴 채 마스크를 쓴 사람에게 다가가. 


18.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이 아무 말이야말로 용구 형의 ‘케이 마스크’가 아닌가.




위의 글은 '조각보 글쓰기'의 예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글쓰기의 과정 중 '발췌'에 대한 예이기도 합니다. 위의 자투리 글 대부분이 발췌한 글이니까요. 제가 한 일은 그저 발췌한 글들을 이리저리 이어 붙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발췌에 대해, 또 글쓰기의 과정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글쓰기에는 여섯 개의 발이 필요하다'란 글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https://brunch.co.kr/@kimidada/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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