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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득 Jul 05. 2021

주변시 글쓰기

그리고 ‘굴튀김 이론’ (feat. 무라카미 하루키)


저는  번인가 기회가 되는 대로 ‘주변시 글쓰기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단편적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다가 덧붙여 언급했을   번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같아요. 이번 글에서는 주변시 글쓰기를 주제로 한번 써보겠습니다.



주변시 글쓰기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주변시란 무엇인지 말해야 하겠지요. 저는 군에서 처음 주변시란 말을 들었습니다. 군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전투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없다." 그만큼 경계가 중요하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경계는 주간보다 야간에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낮과 달리 밤에는 어둠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고 사람이나 사물의 식별이 어렵기 때문이죠. 그래서 군에서는 야간 경계 요령을 교육하면서 야간시의 특성을 가르칩니다.



야간시의 특성에는 적응시, 이원시, 주변시가 있어요. 이 글의 목적이 야간 경계 요령을 설명하는 글은 아니기 때문에 주변시에 대해서만 말하겠습니다. 야간에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눈 안쪽의 간상세포에 상이 맺히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간상세포는 4~12초 정도가 지나면 기능이 마비되기 때문에 대상을 계속 바라보면 오히려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그냥 잘 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상상하는 대로 보였습니다. 바위나 나무가 남자로, 여자로 보이기도 했어요. 그러니 정말 경계해야 하겠지요. 야간에는 시선을 보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주변으로 계속 불규칙하게 옮기면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그 대상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변시는 그걸 말하는 겁니다.



주변시가 무엇인지는 이야기했으니 이제 주변시 글쓰기를 말할 차례네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보초를 서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글을 쓸 때 우리가 느끼는 고독과 막막함이 그렇지요. 두려움과 고단함도 비슷합니다. 사방이 어둠이고 어둠 속에서 적이 다가오고 아니 어둠 전체가 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섭고 두려운데 한편으로는 피곤하고 졸리지요. 이 고단한 두려움, 이 무서운 피로감도 글쓰기와 야간 경계는 비슷한 것 같아요. 대체 이 밤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원고 역시 언제 끝낼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지요. 또한 주제에 집중하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 역시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글쓰기의 동사 둘 (brunch.co.kr)’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만일 그래도 막막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주변시’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어둠 속에서 한 물체를 집중해서 보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 보이지 않고,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볼 때 비로소 그 사물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니까 막막할수록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말고 ‘무엇의 주변’에 대해 써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제 지인은 주변시 글쓰기를 보더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굴튀김 이론’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했어요. 물론 하루키 작가의 ‘굴튀김 이론’이 훨씬 멋지다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하루키 씨를 끌어들여 송구합니다만 <잡문집>에 실린 그의 굴튀김 이론은 이렇습니다.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생각에 그건 굳이 따지자면 의미 없는 설문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예를 들어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쓰는 일은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까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나의 ‘굴튀김 이론’입니다. 다음에 자기 자신에 관해 쓰라고 하면, 시험 삼아 굴튀김에 관해 써보십시오. 물론 굴튀김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민스 커틀릿이든 새우 크로켓이든 상관없습니다. 토요타 코롤라든 아오야마 거리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든 뭐든 좋습니다. 내가 굴튀김을 좋아해서 일단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자기 자신에 관해 쓰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주변에 대해, 그러니까 굴튀김이든, 민스 커틀릿이든, 새우 크로켓이든, 디카프리오에 대해 써보라는 거죠. 그렇게 자신의 주변에 대해 쓰면, 자동적으로 자신과 그것들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표현되기 마련이고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라는 겁니다. 좀 비슷한가요? 이왕 하루키 씨의 '굴튀김 이론'을 인용하는 김에 조금 더 끌어와 보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간단히 말해 이렇다. 나의 테두리는 열려 있다. 뻐끔 열려 있다. 나는 그곳으로 세상의 굴튀김과 민스 커틀릿과 새우 크로켓과 지하철 긴자선과 미쓰비시 볼펜을 잇달아 받아들인다. 물질로, 피와 살로, 개념으로, 가설로.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활용해 개인적인 통신장치를 만들어나가고자 노력한다. 마치 ‘E.T.’가 주변에 널린 잡동사니를 조립해서 행성 간의 통신장치를 만들어낸 것처럼. 뭐든 좋다. 뭐든 좋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내게는. 진정한 내게는.”



하루키 씨의 '굴튀김 이론'은 마치 ‘E.T.’가 주변의 잡동사니를 조립해서 행성 간의 통신장치를 만들어낸 것처럼 주변, 그게 뭐든, 뭐든 좋으니까, 주변의 것들에 대해 쓰는, 주변시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


l  위에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씨의 글은 모두 그의 <잡문집> 중 ‘자기란 무엇인가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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