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성찰
요즘은 코로나 19 때문에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가족이 모일 수 없습니다만 그 전에는 가족끼리 모이면 가끔 화투를 치기도 했습니다. 저는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화투에도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 사람 수가 부족한 경우 더러 판에 끼기도 하지만 매번 잃기만 하니까요. 주로 선수들, 그러니까 화투를 잘 치는 다른 가족들이 하는 걸 옆에서 구경하는 정도랍니다. 그렇게 구경하다 보면 화투를 잘 치고 돈을 따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어요. 그 특징들은 어쩌면 글쓰기에도 필요한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투와 글쓰기의 공통점에 대해 쓴 글을 아래에 붙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가?
얼마 전에 독자 메일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가?”를 묻는 내용이었다. 그 질문에 내가 제대로 답할 자격도 능력도 안 되지만, 그래도 나름 성의껏 대답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도 아내도 노름을 즐기지 않는다. 사실 나는 노름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멀리한 경우지만 아내는 원래 노름을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어쩌다 처가 식구들이 모여 화투를 치게 되면 매번 나는 돈을 잃고 아내는 딴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선 판이 벌어지면 아내는 자리 신경전을 벌인다. 담요 한 장을 놓고 둘러앉는 그 좁은 자리 중에 좋은 자리, 안 좋은 자리가 따로 있을 리 없을 터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아내가 자리 운운하는 것은 기선 제압을 위한 제스처다. 분위기를 잡는 것인데 그러니까 아내가 치는 것은 이른바 자기 주도 화투다. 가령 아내는 선을 할 때 자기부터 패를 놓은 다음 시계방향으로 패를 돌린다. 문제 제기를 하면 그건 선 마음이라고 대꾸한다.
아내는 판 전체를 본다. 화투를 하는 동안 나는 내 패 보기에 급급한데 아내는 자기 패는 물론이지만 바닥에 펼쳐져 있는 패를 보고 남이 어떤 패를 내는지도 유심히 살펴본다. 화투를 칠 때 상대방이 무심코 하는 반응이나 표정도 놓치지 않는다. 나는 방심하다가 내 패를 아내에게 들키는 경우가 잦다. 아내는 절대 자신의 패를 내보이는 법이 없다. 언젠가 아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원래 화투는 남의 패로 치는 거래.”
노름이 시작되고 10분이 지나도록
호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판의 호구는 바로 자신이다.
화투를 치면서 아내는 부지런히 남을 관찰하지만 자신을 성찰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다. “노름이 시작되고 10분이 지나도록 호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판의 호구는 바로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도박영화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아내에겐 자신을 돌아보는 감각이 발달해 있다.
패가 좋지 않으면 아내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 판에서 빠진다. 화투를 치다 보면 돈을 따는 시기가 있고 잃는 시기가 있다. 아내는 그 지점을 잘 안다. 한창 돈을 따다가 어느 순간 잃기 시작하는 그 지점에 정확하게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과일 좀 내올게.” 물론 아내가 내온 과일을 사람들이 다 먹고 그 판이 끝나도록 아내는 화투를 잡지 않는다. 내 경우는 오히려 돈을 잃기 시작하면 눈에 불을 켜고 화투판에 더 바짝 다가간다. 그러고는 결국 판돈과 시간과 체력을 탕진하는 것이다.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일까? 중학교 때 국어를 가르치셨던 ‘예를 들면 선생님’의 말씀처럼 새롭고, 재미있고, 문제의식이 있고, 꿈이 있는 글일 것이다. 선생은 네 가지 모두 있으면 훌륭한 글이지만 한 가지만 있어도 좋은 글이라고 했다. 어쩌면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화투를 잘 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내가 화투를 칠 때처럼 자신의 주변을 열심히 관찰하고 스스로를 성찰한다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관찰과 성찰이 좋은 글을 담보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출발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내가 뭘 쓰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글쓰기와 화투의 공통점에 대해 쓰고 있다고 말한다. 둘 다 관찰과 성찰이 중요한 것 같다고.
내 말을 들은 아내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관찰도 중요하고 성찰도 중요한데 진짜 중요한 건 현찰이지.”
관찰과 성찰은 화투보다 글쓰기에 더 필요한 기술이고 자세인지 모르겠습니다. <문장강화>를 쓴 작가 이태준 선생은 글을 쓸 때 "오래 보고 고요히 생각하며" 쓰라고 조언했습니다. 오래 보는 것이 곧 관찰이고,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성찰이 아닐까 싶어요. 호기심과 관심의 눈으로 세계를 끈기 있게 살펴보는 것이 관찰이라면, 차분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성찰일 테니까요. 좋은 글은 언제나 거기서 비롯되고 시작하겠지요. 관찰과 성찰이야말로 좋은 '글쓰기 준비의 기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