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롤로 May 31. 2024

사진

내 방에 남아 있는 이삿짐을 정리하던 엄마가 버릴 물건들 속에서 발견했다며 작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원색 옷을 입고 있는 더벅머리 어린 소년이 손에 'V'자를 그린채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더 촌스러운 어린 소녀가 맨발로 서 있었는 데 나와 사촌동생인 수연이었다. 사진을 보내온 엄마가 사진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이 추억 어린 장면을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전화를 걸어왔다.


"이 사진 기억나니? 어쩜 이렇게 귀엽니 둘 다. 수연이 진짜 귀엽다. 다들 저렇게 쪼꼬만 하고 귀여웠는데 이제는 다 커서 엄마랑 놀아주지도 않지."

"이게 언제야. 나는 기억도 안 나"


"이거 아빠가 처음 차 사고 너랑 나랑 수연이 데리고 대둔산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잖아. 수연이 맨발인 거 보이니, 아니 글쎄 대둔산 계곡에 도착해서 내렸는데 수연이 발에 신발이 없는 거야. 신발 어딨 냐고 물어봐도 그냥 사탕만 빨면서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분명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땐 신고 있었는데 아마 중간에 식당에 들렀을 때 거기 벗어두고 맨발로 탄 거 같더라고, 맨발에 옷도 잠옷 같은 거 하나 걸치고 있지 살은 타서 새카맣지 누가 보면 엄마 아빠 없는 애 같더라니까. 근데 그게 또 어찌나 귀엽던지. 수연이 인형 같았어. 근데 넌 또 그런 수연이가 불쌍하다면서 수연이 네가 계속 업고 다녔잖아."

"기억났어"


통화를 끝마치고 손 위에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다시 살펴보았다. 초록색으로 뒤덮인 계곡 앞 도로에 작은 '포니' 한 대가 서 있다. 아마 아빠의 첫차이리라, 그리고 그 앞에 더벅머리 소년과 꾀제제한 여자 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여자 아이의 손에는 먹다 만 눅눅한 사탕이 들려 있고 유독 오동통한 여자 아이의 다리와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수연이 잘 먹고 잘 크는 중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선크림 따위는 발라본 적 없는지 두 아이 모두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오래된 사진이 가져다준 추억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작은 사진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쉼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에 드는 것을 포기하고 스탠드 불을 켜고 다시 사진을 보았다. 일요일이면 손걸레를 가지고 애지중지 세차를 하던 아빠의 첫차 포니는 내가 초등학교 갈 즈음 우리 가족을 떠났다. 수연이도 대학교에 입학할 때 대전을 떠나 서울로 가버렸다. 오동통했던 다리에는 새하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즈음 엄마와 나도 대전집을 정리하고 외할머니가 계신 서울로 집을 옮겼다. 


엄마에게 받은 사진을 수연에게 보내주었다. "타잔과 거지"라는 메시지와 함께. 잠시 후 사진을 본 수연이가 "나 왜 신발 없어?", "내 다리 뭐야 소세지야 뭐야?"라며 답장을 보내왔다. 수연과 사진에 대해 한참 이야기 하다가 이제 정말 자야겠다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협탁 위에 올려 두고 눈을 감았다.


가끔 누군가와의 오랜 만남도, 즐거웠던 유년 시절의 추억도 그리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이야기도 그저 작은 사진 한 장으로 남겨질 때가 있다. 일상이 바쁘단 핑계로 조금씩 잊혀져 갔던 추억들은 그 작은 사진 속에 압축 되어 책장 어딘가 또는 앨범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보낸 사진 한장이 풀어낸 이야기 덕분에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터캣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