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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Oct 17. 2024

콜드플레이 2017

따사로운 햇살이 살갗을 스치는 부드러운 기운이 느껴지고 옷차림이 한껏 가벼워진 것이 바야흐로 봄이었다. 실로 나들이 하기 좋은 계절에 내 발목 인대가 뚝하고 끊어져버렸다. 운동하다가 다친 발목을 낑낑 대며 힘겹게 집에 도착한 나는, 밤새 끙끙 앓으며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음날 아침 택시를 불러 힘겹게 병원으로 향했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보이시죠. 인대가 많이 끊어졌네요. 발목도 많이 부었고요. 깁스할게요."

"네?"


얼결에 깁스를 한 발목을 보고 나서야 내가 앞두고 있는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당장 해야할 회사에서의 일들과 밀린 업무들, 친구들과 가기로 한 여행까지, 달력이나 일정표를 보지 않고도 선명하게 스치는 그 일정들이 일순간에 걱정거리가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난 '콜드플레이 콘서트'를 보자마자 나는 퍼뜩 정신이 들고야 말았다. 맙소사.


"깁스 얼마나 해야 된다고 하셨죠?"

"이 정도면 최소 4주네요."


재빨리 날짜를 계산했다. 의사가 말한 4주 속에 '콜드플레이 콘서트'도 들어가 있었다. 실로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슨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들의 콘서트에 갈 수 없게 되다니.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직 수수료를 물지 않고 콘서트를 취소할 수 있는 기간이라는 것이다.


유튜브는 물론이거니와 멜론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CD플레이어와 MD 같은 기기가 있어야 집 밖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던 시절 그때 처음으로 콜드 플레이, 블랙아이드피스, 린킨파크, 에이브릴 라빈 같은 가수들을 만났다. 동해와 서해를 건너고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넌 나라에도 수많은 가수가 존재했다. 인터넷이 점차 퍼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서로의 취향을 '세계적'으로 공유하기 시작할 무렵 나도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이다.


그중에서도 콜드플레이의 노래가 좋았다. 그들의 노래에는 국내 음악에서는 들을 수 없는 독특한 멜로디, 사랑타령 일변도의 유행가들과는 다른 희망 차고 아름다운 가사들이 있었다. 브리티쉬 락 음악이라는 실로 멀고도 어색하기만 한 음악을 접하기 위해 나는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 CD를 먼저 구한 친구들을 찾아가 빌렸다. 좀 더 마이너 한 가수들의 음악은 어두운 세계에서 음악을 구하는 친구들에게 찾아가 어둡게 음반을 전달받아야만 했다. 


"콜드플레이 이번 앨범 노래 진짜 좋아."

"오 진짜? 빨리 들어봐야겠다."


랜덤 플레이나 AI는 없었다. 상황에 맞춘 추천 음악도 없고 '떼껄룩'도 없다. 수요보다 공급이 적은 그때 그 시절 음악 시장에서 우리는 전해지는 음악들을 전달받아 들었고 그때 들은 음악들을 '태정태세문단세'처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들이 지금과 같은 음악 시장에 등장한 신인이었다면, 저기 홍대 어딘가의 지하 홀에서 노래 부르다 그들만의 콘서트를 끝내고 작은 술집에 모여 소주 한잔 하다가 리더가 한숨을 쉬며 '우리 그만 해체하자'라고 말하며 종말을 맞이하는 흔하디 흔한 밴드 중 하나가 되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어쨌든 그들은 당대 최고의 밴드였고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자란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들의 음악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말이다.


2015년 'A Head Full of Dreams'가 발매되었다. 일하느라 사람 만나느라 노느라 잊혀졌던 그들의 음악을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그들의 첫 방한이 결정된 것이다. 예매창을 열어보기 전까지 그 시절 향수에 젖어 있는 나와 같은 늙은이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힘겹게 티켓을 구했고 이제 콘서트장에서 그들의 음악을 라이브로 즐길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나에게 발목을 두껍게 감싸 쥔 깁스는 절망 그 자체였다.


시간은 착실히 흐르고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콘서트 날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있는 나의 발목은 여전히 깁스를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7시, 나는 잠실 주 경기장 D구역 10열 5번 좌석에 앉아 있었다. 무리해서 몸을 움직인 탓에 깁스 속 퉁퉁 부은 발목의 통증이 느껴졌다.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오르고 힘겹게 길을 걸었기에 등 뒤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가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의자에 앉은 뒤에도 한동안 헥헥거려야 했다. 오며 가며 써야 할 택시비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것도 슬펐다. 그렇게 한참 동안 손익계산을 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순간 크리스마틴이 'A Head Full of Dreams'를 부르며 무대에 등장했다. 잠실 주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큰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손에 걸쳐진 팔찌가 빛나며 경기장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노래가 바뀔 때마다 경기장은 색색깔의 빛으로 물들었고 사람들은 'Hymn for the Weekend' 'Adventure of a Lifetime' 등 그가 부르는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불렀다. 마침내 그가 'Yellow'를 부르자 경기장은 노랗게 물들었고 사람들은 울었다. 'Fix you'를 부를땐 무언지 모를 아픔이 낫는 느낌이 들었다. 놀랍게도 나의 발목 통증도 사그라들었다. 콘서트가 끝난 뒤 한껏 고양된 마음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택시에 앉아 '역시 오길 잘했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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