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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Oct 31. 2024

가을밤에 든 생각

잠이 오지 않는 주말 새벽은 지난 시절 추억을 회상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 그만 추억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잠들고자 노력했지만 실눈을 뜨고 확인한 시간은 새벽 2시였다. 잠들기를 포기하고 이불을 걷어찬 뒤 거실로 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창을 여니 희뿌연 안개들이 베란다 문틈을 타고 촉촉한 냉기와 함께 밀려들어왔다. 그 냉기가 싫지 않았는지 창문을 닫지 않고 밖을 바라보며 아그참파를 하나 꺼내어 불을 붙였다. 타들어가는 향초를 바라보며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아까 하다만 지난 시절 추억에 다시 빠져든다.


11월 말, 안개가 가득한 중앙도서관 자판기 앞에 너와 내가 서 있다. 달달한 밀크 커피를 손에 쥔 우리는 쉴 새 없이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너는 공부를 많이 했느냐 물었고, 나는 이제야 겨우 한 번 읽어봤다고 너스레를 떤다. 전공 시험을 앞두고 우리는 중앙 도서관 열람실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하기로 했던 터라 졸린 와중에도 잠들지 않기 위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다.


"선배, 선배는 몇 시까지 공부할 거예요?"

"나? 기숙사 문 5시에 열리니까. 아무래도 5시까지는 하다가 가지 않을까?"

"그래요? 5시는 너무 피곤하지 않겠어요?"

"나야 기숙사 들어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아직 못 본 게 많아서 그 정도는 해야 될 거 같은데."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일까, 너는 잠시 망설이더니 남아 있는 밀크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럼 최대한 그때까지 버텨봐야겠다."


쌀쌀하면서도 맑은 새벽 공기가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들었다. 내내 탁하고 밀도 높은 공기가 가득한 열람실에 있다가 잠시 나와 바깥공기를 쐬며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폐가 맑은 공기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맨살이 드러난 곳들에 다가와 부딪히는 찬 공기 덕분인지 머릿속도 맑아졌다. 시계를 확인한다. 12시. 수업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한 뒤부터 계속해서 열람실에 있었으니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선배, 배 안고파요?"

"배고프지. 좀만 더 하다가 떡볶이 먹으러 갈까?"

너의 눈이 번뜩 빛나는 것 같았다.


"좋아요. 우리 2시에 나가요."

"그래. 그럼 2시까지만 하다가 나가서 떡볶이 먹고 오자."


다시 열람실 의자에 앉았다. 서걱서걱 볼펜, 연필, 샤프가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우웅'하며 난방기가 돌아가는 소리, 조심스럽게 의자를 끄는 소리, 누군가 바스락 거리며 사탕 혹은 초콜릿 포장을 벗기는 소리도 들렸다. 집중할수록 크게 들리는 이 작은 소리들이 이상하게도 나를 더 집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12시를 넘어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간에도 열람실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시험 기간을 앞두고 나와 선경이처럼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았다.


전공 시험공부를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40분 정도가 되었다. 눈이 점점 침침해지고 펜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책을 덮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선경이가 있는 제2 열람실로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열람실 책상들을 지나 선경이의 자리 뒤에 섰다. 선경은 피곤했는지 담요를 덮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베고 있는 전공책에 선경이의 입에서 나온 반짝거리는 액체가 묻어 있는 것 같았지만 외면하고 선경을 조용히 깨웠다.


번뜩 눈을 뜬 선경이 나를 올려다봤다. 크게 뜬 눈이 '왜'하며 묻는 것 같아 손으로 숟가락을 쥔 모양을 만들어 입으로 가져간 뒤 나지막이 '떡볶이'라고 읊조렸다. 그제야 너는 입가에 묻은 침을 대충 닦고는 주섬주섬 옷가지와 휴대폰을 챙겨 나를 따라나섰다. 급하게 닦은 침 때문에 너의 회색 소매가 축축해진 것을 보았지만 이것도 애써 외면했다. 


"와. 선배 나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언제부터 잠든 건지 기억도 못하겠어요."

"너 코 골던데"

"네?"

"농담이야. 떡볶이 1인분에, 순대도 먹을래?"

"당연하죠."


떡볶이 집에는 우리처럼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빨갛고 매콤한 떡볶이를 허겁지겁 먹으며 또 재잘재잘 떠들었다. 부지런히 배를 채운 너에게 나는 냅킨을 뽑아 건넸다. 입가에 묻은 떡볶이 자국과 함께 그제야 지워지는 너의 침자국을 보며 속으로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떡볶이를 다 먹고 나니 차가워진 새벽 날씨에 식었던 몸과 마음이 다시 달아올랐다. 5시까지 최선을 다해 공부하기로 다짐하며 우리는 안개로 가득 싸여 흐릿하게 흔적만 보이는 학교 정문을 지나 중앙 도서관으로 함께 걸어갔다. 


가득 채워 든든해진 배를 가지고 누가 그 새벽에 정신을 붙들고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책상에 앉자마자 졸기 시작하여 약속했던 시간인 새벽 5시까지 깨지 않고 잠들었다. 이럴 바엔 기숙사에 가서 자는 게 낫겠다 싶어 책과 필기구를 정리해 가방을 싸고 선경의 자리로 가보았다. 선경의 전공책은 또다시 눅눅해져 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웠다. 


"집에 가자"


낮게 속삭인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선경이 부지런히 짐을 싸고 가방을 챙겼다. 


희미하게 빛을 발하던 아그참파 끝 붉은색 불똥이 '지직'하더니 그 마지막 향을 다하며 안개가 가져온 습기 속으로 고꾸라졌다. 안개처럼 향처럼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나는 그날 선경을 집에 데려다주었던가 아니면 중앙 도서관에서 그녀를 혼자 보내고 기숙사로 향하는 계단을 걸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손을 잡았던가 생각하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희미해져 알 수 없는 지난 기억에 대한 회한이 들 때쯤 밀물처럼 밀려온 졸음에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하고 생각하며 다시 침대 위 이불속으로 지친 몸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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