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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Dec 12. 2024

드라이브 마이카

차분하게 가라앉은 새벽공기를 타고 잔잔한 음악이 차 안에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가로등 불빛조차 힘을 발하지 못하게 남색으로 혹은 회색으로 주변을 짙게 눌러앉게 만드는 새벽 특유의 분위기가 가득 찬 도로를 시속 50km의 속력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달려 나간다. 6시를 갓 넘긴 이른 시간에도 도로에는 제법 많은 차들이 늘어서 있다. 빨간 신호등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줄이 이어진 차들의 행렬이 쉬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차가 아슬아슬하게 교차로를 지나쳐 간다. 좁은 2차선의 골목길을 지나 곧 내부간선으로 오르는 길을 앞두고 나는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부간선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차들이 길게 줄을 서 늘어져 있다. 그 길로 가기 위해 몰려드는 수많은 차들의 모습에 핸들을 쥐고 있는 나의 손에는 몽글몽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더불어 발놀림도 심상치 않게 바빠져 있었다. 간격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액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가며 바쁘게 밟아댔고 말똥말똥해진 눈은 오른쪽 사이드미러와 앞차와의 간격을 번갈아가며 살피느라 분주했다. 이윽고 내부간선에 오르기 200m 전, 나의 긴장감은 최대치로 달아올랐다. 이곳에서는 늘어선 줄을 피해 뒤늦게 얌체처럼 끼어들기 위해 접근해 오는 차들과 오랫동안 행렬이 줄어들기만을 바라며 좁은 간격으로 운전하고 있는 차들의 신경전이 극에 달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오른쪽 사이드 미러에 비친 파란색 미니쿠페가 굉장히 신경 쓰였다.


역시 나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이밀며 뒤늦게 깜빡이를 켜고 내 앞에 끼어들기 위해 다가오는 파란색 미니 쿠페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부아앙"하며 액셀레이터를 밟아버렸다. 급격히 좁아진 간격에도 파란색 미니쿠페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나와 나란히 달리기를 몇 초간 지속하더니 이내 포기하고 다시 2차선으로 빠져나갔다. 점차 속도를 늦추며 뒤로 빠지는 미니쿠페를 보며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도 잠시, 몇 초 뒤 다시 나타난 파란색 미니 쿠페는 나의 차를 앞질러 저 앞에 있는 흰색 제네시스와 회색 모닝 사이의 간격이 벌어진 것을 확인하고 얄밉게 "슉"하고 들어가 버렸다.


핸들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입에서 나지막이 짧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XXXX" 이어 어김없이 간격을 내준 모닝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고 파란색 미니 쿠페 운전자의 잔혹한 앞날을 기도하기도 했다. 가끔은 이토록 잔혹하게 다른 이의 앞날에 저주를 내뿜는 나의 모습에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차오른 분노는 부끄러움마저 타락시켜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열차 맨 앞자리에 앉아 함께 증오의 선로를 미끄러져 나갔다. 


경험에 비추어 이 사태를 미리 예견한 과거의 내가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만이 차분히 자신의 감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화를 가라앉히기에 적합한 느린 템포의 음악과 슬픈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들을 연이어 들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으면 곧 서부간선으로 진입하기 위해 성산대교를 건너게 된다. "다른 다리도 많은데 아침에 출근하는 서울 사람들은 모두 성산대교만 건너는가!" 하는 분노가 저변에 깔린 어두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성산대교 좌측, 국회의사당과 높은 빌딩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미는 붉은 해와 주홍 빛깔의 띠가 보이는데 이 아름다운 일출은 그나마 아침 출근길의 짧은 위안이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 이유를 모르겠지만 한참 동안 천천히 가는 거북이 같은 차량, 신호가 바뀌어도 핸드폰을 보느라 움직이지 않는 앞차, 이유 없이 하이빔을 날리는 뒤차와 공간만 나오면 무지성으로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정신분열자가 타고 있는 것 같은 차까지 지나치고 나자 어느새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쌓였던 분노가 점차 사라지는 망각의 시간이 찾아왔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내뱉었던 저주의 말들과 다음번에 만나면 피로 응징하겠다며 만든 분노의 살생부가 괜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겐 나도 도로의 무법자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증오를 작게나마 가슴에 품고 차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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