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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엔 Dec 07. 2020

열렬히 좋아했던 스타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나요?

10의 덕질, 드디어 오빠 만나다.


내 또래의 학창시절 스타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HOT' 혹은 '젝스키스'로 집약된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시절까지 우리가 좋아했던 많은 스타들 중 큰 흐름을 짚어 보자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들었던 모든 음악이 그들의 음악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한국 젊은이들이 팝보다 가요를 많이 듣게 되기 시작한 것도 저 때부터 였을 거라 생각한다.


다들 저들을 쫓을 때, 나는 다른 오빠들을 쫓아다녔다. 비디오형 가수와 오디오형 가수를 나누기 시작했던 그 당시, 나는 오디오형 오빠들, 그러니까 얼굴 보단 음악이 훨씬 멋진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았겼다. 오직 음악으로만 승부하겠다는 자존심으로 TV에 잘 나오지도 않고, 립싱크를 혐오하며 반주 마저 라이브를 고집하던 오빠들.

 

TV에 출연하지 않으니 자료 구하기가 쉽진 않았지만 그들도 오디오형 가수 중에서는 엄청난 스타였기 때문에 하이틴 잡지며, 포스터, 라디오 방송 출연, 공연 실황 비디오 테이프 등 찾자고 마음만 먹으면 꽤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포스터는 할아버지 방만 빼고 온 집안에 붙였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날엔 방송 중간중간 나오는 광고를 기술적으로 커트해내며 오빠들의 토크를 놓치지 않고 모두 녹음해서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테이프들을 듣고 뒤로 돌려 또 듣고 또 돌려 또 듣는 꿈을 꾼다. 나에게 끈기란 것이 있다면 이 때 길러진 것일 것이다.


LP와 테이프가 나오던 시절엔 오빠들이 앨범을 내면 LP와 테이프 모두 샀고, LP가 사라지고 CD가 나오면서부터는 테이프와 CD를 수집했다. 테이프가 사라지고 CD만 나오면서부터는 같은 CD를 듣는용, 소장용으로 2장씩 샀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면 집착으로 변질되는 무서운 습성은 이 때가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발전한 내 집착의 최대 피해자는 아마 내 남편일 것이다.


오빠들의 공연은 당연히 다 갔다. 보통 서울에선 코엑스 대서양관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이틀을 공연하면 이틀을 다 갔다. 늘 아침밥 먹고 출발해서 줄을 섰지만 나보다 더 부지런한 팬들이 대서양만큼 많았던 덕분에 늘 공연장 맨 뒷쪽에서 볼 수 밖에 없었다. 대서양관은 얼마나 넓은지 맨 뒷자리에서는 무대 위 오빠들이 코딱지로 보일 정도였는데 대서양관이 아니라 태평양관이라고 이름을 바꿔야한다고 욕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에도 대서양관 맨 뒷자리에서 공연을 또 봤다. 무대 윗쪽에 달린 커다란 화면에 나오는 오빠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실신할 듯이 흐잉흐잉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공연이 끝나면 지하철을 타고 멀쩡히 집으로 돌아왔다.


푹푹 찌던 1994년 한여름, 주소만 들고 신사동에 있다는 오빠들 사무실을 찾아가려고 땡볕에 신사동을 하루종일 찾아 헤매느라 나와 내 친구 미영이는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결국 사무실은 찾지 못했다. 오빠들의 팬도 아니었던 미영이는 내가 부탁해서 같이 가줬던 것인데, 안 그래도 까만 애가 아주 못봐주게 됐지만 나를 탓하지 않는 정말 착한 친구였다. 아직도 그 날 일이 미영이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운데 사무실을 찾지 못한 건 정말 다행인 것 같다. 그 앞에서 시꺼매진 몰골로 무슨 진상을 떨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런이런 인상 착의의 키작은 여중생 둘이 사무실 앞에서 추태를 부렸는데 또 나타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사무실 직원들이 오빠들에게 일러두어 내 몽타주라도 들고 다니다가 어느 길목에서 수줍은 미소로 오빠를 기다리고 있 나를 발견하곤 뒷걸음질 치면서 경찰에 신고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멤버 중 오매불망 가장 사모한 오빠와 결혼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열한 살부터 스무살까지 우리 엄마도 못말린 열렬했던 짝사랑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정확히 내 나이 서른 살, 엄청 추웠던 겨울 저녁, 압구정 스타벅스 지하에서 나는 정말 그 오빠들 중 한 오빠와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말도 안 되고 허무맹랑하기까지한 꿈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비현실적이었지만 내가 오빠와 함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꼭 같은 음악인으로서 오빠를 만나 결혼해야겠다는 목표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음악 대학에 갔고, 음반 제작 회사에 근무하게 되었고, 당당하게 오빠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음반 제작 기획일을 하고 있던 나는 오빠들의 데뷔 20주년 헌정 앨범을 만들겠다는 기획으로 당시 활동을 거의 하고 있지 않던 오빠를 어렵사리 만나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안 될 사이


하지만 운명의 장난도 지나치지, 이미 나는 결혼한 몸이었다. 그것도 오빠를 만나기 1년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쇼핑백이 찢어져라 바리바리 싸들고 간 오빠들의 모든 앨범들, 비디오를 스타벅스 테이블 위에 주르르 꺼내놓고 사인을 받는 것 뿐.. 최대한 호들갑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한 장 한 장 꺼내 놓았다. 영화 <미져리>의 미치광이 여성팬 '애니'처럼 보이지 않으려 라디오에 출연했던 오빠의 숨소리까지 녹음해서 2000번 정도 들었다거나, 오빠와 결혼하려 했다라거나, 오빠집 동/호수까지 알고 있다(진짜 알고 있었다.) 같은 얘긴  않았다. 그저 평생을 오빠들의 정상적이실한 팬으로서 살아왔다는 것 진하게 토로했다.


오빠는 깍듯하면서도 냉정하고 조심스러운 듯 하면서도 직설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찐팬임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업체 직원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대하지 않았다. 그건 괜찮았다. 원래 까칠함이 오빠의 매력인 것은 내가 열 한살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안쓰러울 정도로 줄줄이 자신의 앨범을 꺼내놓으며 사인을 구걸하는 사람을 본다면 나 같으면 조금의 고마움이라던지 연민이 느껴져서 약간의 친절은 베풀텐데.. 하고 서운한 마음이 아주 조금 들긴 했다. 아니면 고마웠기 때문에 그정도라도 대해 준 걸 수도 있겠다.


CD를 늘어놓았던 첫 만남 이후, 오빠와 메일과 전화로 연락하며 본격적으로 일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오빠는 음악 활동에 다시 시동을 걸고 싶어 했던 거 같다. 그래서 홍보에 도움이 될까 하고 어느 음반 제작사의 담당자(나)를 만나주었던 걸거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한국 대중음악계를 휩쓸었던 오빠는 저작권료도 휩쓸어 갔을거고 그로 인해 이미 돈이라면 내가 다니던 회사 정도는 그 자리에서 사버릴 정도로 많았을 터이다. 헌데 그런 오빠에게 난 곡비를 깎아달라고 했다. 다른 작곡가나 가수들에게 흥정해 왔듯이 오빠에게도 그랬던 것이다. 얼마나 같잖았을까 생각하니 지금도 머리를 쥐어 뜯고 싶다.


일이라는 게 성사가 되는 경우보다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렇게 마음 상하게 결론이 지어졌던 적도 없었다. 곡비 흥정의 댓가로 난 대스타에게 곡비를 깎는 양아치가 되어버렸다. 인텔리한 오빠가 대놓고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천재끼를 번뜩이며 날리는 오빠의 촌철살인은 나에게 독설이 되어 완전히 상처가 되었다. 정확히 오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원래 마음이 상하면 그 기억을 일부러 지우는 능력이 탁월하다. 어쩌면 그저 사무적으로 거절한 것 뿐인데 내가 너무 크게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오랜 시간동안 너무나 좋아해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스타여도 그렇지, 타협도 좀 하면서 유연하면 좀 좋아요? 영원히 그렇게 화석으로 사시던가요!'


라는 말은 못하고 마음에 담아 둔 채 나는 그들의 안티가 되어버렸다. 몇 년 지나고 또 한 번 길거리에서 우연히 오빠를 보게 되었는데 못 본 척 그냥 지나갔다. 양아치 업체 직원으로 찍혔을거라 생각해서 피한건지, 오빠에게 서운한 맘이 아직 가시지 않아 지나쳐버린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오빠는 나와 그 사건을 기억조차 못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게 철두철미하고 섬세한 사람은 그런 일을 잊을 리가 없다. 내 경험으로 음악하는 남자들이란 커피숍에서(술집이 아니고 커피숍이다.)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며 헤어질 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를 소름끼치게 전부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계획한 것처럼 같은 음악인으로서의 만남이 아니었다. 제작비를 한 푼이라도 줄이려는 회사와 음악을 돈과 결부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신성한 아티스트와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잘 될래야 되기 힘든 관계였다. 내가 처음부터 흥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제작비 때문에 회사 윗선에서 커트당할 일이었고, 음악 얘기보다 수지타산 얘기만 하는 업체가 못마땅해서 어차피 오빠가 끊어버릴 관계였다.


단지 내가 후회하는 것은 내 돈도 아니었는데 애사심에 불타 올라 뭐하러 흥정을 하려 들었던 걸까 하는 점이다. 오빠에게 제작비 절감에 대해 얘기 하는 대신 곡비를 깎아오라고 한 팀장을 한 대 멕였어야 하는건데..

지금이라도 오빠에게 사과하고 싶다. 나는 단지 일한 대가로 나에게 살아갈 돈을 주는 회사의 직원이었을 뿐이라고..너무 구차한 변명인가?





5만원과 함께 날아간 오빠들


1년 전 즈음,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며 말밥마켓에 물건 팔기에 한창 빠져있었다. 팔 수 있는 건 다 내다 팔았다. 시아버님 골프채도 팔아버리고(미쳤다...) 깔고 자던 요까지 팔아버렸다. 남편이랑 애들을 팔지 않은게 다행일 지경이다. 팔 수 있으면 팔았을지도 모른다.


오빠가 10년 전 함께 차를 마시며 사인해준 CD들과 비디오도 그 때 팔았다. 학창 시절 최고의 보물이었던 것들. 결혼을 해서 신혼집으로 이사올 때도 보자기에 싸서 소중히 들고 갔던 것들. 쇼핑백이 찢어지게 들고 가서 오빠에게 사인 받았던 것들. 다른 가수의 CD는 다 버렸어도 그것만은 절대로 버리지 못하고 있던 것들. 20년의 팬심과 10년 전 오빠를 만난 신화 같은 추억을 몽땅 5만원으로 책정하고 마켓에 올렸다.



며칠 동안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차가운 바람이 심하게 불던 어느 추운 날 밤, 나보다 몇 살 정도 많아보이시는 여성분이 무척 반가워하시며 기꺼이 5만원을 주고 가져가셨다. 그러나 황망하게도 그 돈은 받자마자 주머니에 넣기도 전에 내 손에서 빠져나가 매서운 바람에 날려 8차선 도로 한복판으로 날아갔다. 돈 5만원을 벌겠다고 오빠들의 CD보따리와 애 둘을 양손으로 붙잡고 나갔다가 돈 쥐랴 애들 쥐랴 바람 막으랴 버둥거리다가 CD값을 날려버린 것이다. 진흙탕이었거나 똥밭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뛰쳐 들어가 돈을 찾아왔겠지만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 뛰어들었다가는 저 세상 가는 거 말고 딱히 다른 결말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돈도 날라가고 오빠들도 날라갔다.


CD들을 팔아치울 때만 해도 오빠들에 대한 서운함과 실망에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엄마가 나에게 "넌 성격이 정말 너무 이상해."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아마 이런 점 때문일 거라 추측된다. 뒤끝이 길어서 두고두고 이를 간다는 점. 이를 몇 년을 갈고 나면 또 몇 년은 드러누워 질질 짠다는 점.


오빠들을 5만원에 팔아넘기고 나서 그간 좀 복잡한 감정이었다. 학창 시절 나의 삶을 지배했던 오빠들한 순간 나를 안티로 만들다니..미웠다. 그리고 내가 오랜 시간 공들여 지켜왔던 CD들이 말밥이 되어 날아간 것에 대해서는 은근히 후회되고 죄책감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가지고는 있을 걸 하고. 내가 오빠들의 CD를 다 팔았다고 얘기했더니 우리 친정 식구들이 모두 놀랐다. 특히 학창 시절 나의 온갖 주접스런 팬질을 옆에서 다 지켜 보았던 친정 오빠는 자기가 더 섭섭해했다. 그걸 보니 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팔아넘긴지가 1년, 그  처음으로 오빠들 음악을 멜론에서 다시 찾아듣는데, 마음이 아파오면서 심장이 쿵쾅대는 걸로 봐선 나의 짝사랑은 아직 끝난 게 아닌게 확실하다. 내가 사랑했던 노래들과 오빠들. 스크롤로 내릴 때릴 때마다 오랜만에 보는 노래 제목들.. 오빠들 때문에 꽁꽁 얼었던 마음을 오빠들의 음악이 녹여주고 있었다. 왠만한 일엔 콧방귀도 뀌지 않는 어떤 심드렁한 아줌마가 노래 한 곡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린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음악인 것이다. 어떤 일이 있었던지 간에 나는 그들을 죽을 때까지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오빠들은 최근에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나보다. 꽤 자주 싱글 앨범을 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대단했던 오빠들이 앨범을 내도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더 많고, 탑100챠트에 오를 일 없어보지만 나를 음악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오빠들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언젠가 오빠들을 다시 만나는 꿈을. 다시 만난다면 업체 직원이 아닌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만나고 싶다. 오빠가 나를 기억 못 한다면 더 잘된 일이다. 내가 10년 전 어느 양아치 회사의 곡비를 깎으려 들던 여자였다는 것은 끝까지 숨길 것이다. 그리고 오빠들의 사진과 CD를 모으며 결혼 계획을 세우던 섬뜩한 여학생이었던 것도 숨길 것이다. 어차피 그 CD들은 지금 나에게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가 오빠들은 알지도 못하는 어느 지질한 여성 팬이 혼자 지지고 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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