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네필, 영화와 글쓰기와 사랑
박한: 아우우~
느티: 뭐하시는 건가요?
박한: 이번 영화의 힌트를 드리는 겁니다.
느티: 혹시 영화가 늑대소년?
박한: 하하하, 제가 송중기랑 비슷하게 생겼죠. 아쉽지만 아닙니다.
느티: 별로 아쉽진 않네요. 그럼 베오울프?
박한: 땡! 정말로 못 맞추시네요. 앞으로 복권은 하지 마세요.
느티: 원래 안 합니다. 그럼 도대체 뭔가요?
박한: 저처럼 귀여운 늑대, 아이입니다.
박한: 어쩌다 보니 이번 영화도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가 되었네요. 사실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는 필연적으로 아동영화일 가능성이 높죠. 주인공의 나이는 관객의 나이와 어느 정도 비례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하지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이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주인공은 옥희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을 겪는 것이 어머니 같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서술하는 주체가 옥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도 [늑대 아이]는 육아 영화라기보다는 성장 영화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2012년에 나왔는데, 벌써 10년 전에 나온 작품입니다. 저는 개봉했을 때 보았다가, 이번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그에 반해 느티 씨는 처음 봤다고 하셨는데, 어떠한 감상이 있으셨나요?
느티: [늑대 아이]는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은 영화로 주변으로부터 추천받은 적이 있어요.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가족애를 주제로 하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인상이 강했지요. 박한 씨의 추천으로 영화를 보고 나니, 생각보다 넓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어린 시절로 초대하는 애니메이션이었어요. 제멋대로 마루를 뛰어다니고, 형제자매와 투닥거리고, 내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볼 새 없이 커가던 그때 그 시절이요. 그 시절 우리가 우리를 들여다볼 수 있게끔 뒤에서 묵묵하고 치열하게 도와주신 것은 어머니셨지요. [늑대 아이]는 내가 스스로 온전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신 감사한 존재가 계신, 내가 지나온 자리를 들여다보는 듯한 영화입니다.
박한: 처음에 영화를 보면서 느티 씨는 늑대아이 남매 중에서 조용한 아메(아들)가 사람들이랑 살게 되고, 활달한 유키(딸)가 자연 속에서 늑대로 살아갈 것 같다고 추측하셨지요. 영화를 미리 봐서 결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유키가 늑대로 자주 변하기도 하고 야생적인 느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히려 유키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간으로 규정하고, 아메는 늑대로 규정하게 되죠. 이러한 인물들의 입체적인 변화를 어떻게 보셨나요?
느티: 영화 초반부에 아메는 자연과 가까운 시골살이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반면, 유키는 밭의 동물들을 잡고 늑대로 변하는 시위도 하는 대담한 모습이었기에 말씀대로 그렇게 추측을 했었어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미래 육아를 하며 얻을 깨달음을 미리 얻은듯한 순간이었답니다. “아이들을 예상하려 하지 말자.” 성장한다는 것은 그전과 그 후의 나의 어떤 부분이 ‘변하는’ 것이지요. 그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것을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아메는 여우 선생님과 산을 돌보며 숲의 생명들을 지키는 늑대의 길을 선택했고, 유키는 학교에서 늑대로 변해 남학생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건 이후 인간의 길을 걷기로 선택하지요. 영화의 엔딩 시점 이후의 아이들에게 어떤 경험이 찾아와서 또 다른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상상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느티: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영화의 이야기를 현실세계에 대한 우화로 생각해본다면, [늑대 아이]는 소수자에 관한 영화로도 생각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명사회가 명문화해둔 틀에 속하지 않거나 극히 소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로요. 제가 만약 ‘하나(엄마)’라면, 관심 있게 돕던 남자가 사실은 늑대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사랑을 지속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마음이 가는 길에 박혀 있는 오해와 편견의 가시들을, 서로가 노력한다면 풀어갈 수 있겠지요. ‘하나’가 시골에서 어르신들의 마음의 벽을 녹이고 마을의 가족으로 인정을 받은 것처럼요. 박한 씨는 [늑대 아이]가 최근의 현실 사회에 주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박한: 질문이 저보다 더 어려우신데요. 사실 현실도 잘 모르고 사회도 잘 모르는 사람으로 이런 질문이 어렵지만, 그래도 최대한 대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피부로 느끼는 현실 사회는 여유가 없어진 느낌입니다. 여유가 없다는 것은 금전적인 여유를 떠나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없어진 것에 가까워요. 사실 출산율이 저조한 것도 미래가 두렵기 때문이겠죠. 이전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미래가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해진 느낌이죠. 10년 전의 감상과 지금의 감상을 비교해보자면, 영화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저의 감상은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내가 소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에 대해 고찰을 했다면, 지금은 내가 소수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가깝다고 할까요. 저는 아무래도 주류 취향과는 잘 맞지 않고, 마이너 하게 자란 것 같아요. 그래서 코드가 맞는 사람을 발견하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거창하지만 자연도 그러하듯, 불필요한 생은 없죠. 도시에는 늑대 아이가 필요 없고 오히려 서로에게 해가 되지만, 세상 모든 곳이 도시는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으니까요.
박한: 저는 아직까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 중에서 늑대 아이만큼 울림 있는 작품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10년 지났는데, 근사치에 이른 작품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좀 씁쓸하긴 하네요. 그래도 그것이 [늑대 아이]의 흠이 될 수는 없는 것이죠. 차라리 득을 보았다면 보지 않았나 싶네요. 인간이라는 말에도 어느 정도 녹아있듯이 사람은 중간자적인 입장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 선택을 하면서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하면서 성장하죠. 여기 나온 아이들은 다들 가볍지 않은 선택을 하죠. 그런 점에서 “늑대, I 어느 쪽이든 선택하면 어른이 된다.” 그럴듯하지만 뭔가 내키지 않는 한 문장입니다.
느티: 저는 영화에서 하나가 아픈 아메를 안고서 소아과와 동물병원 중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깊게 남았어요. 저를 키우시며 제 어머니도 숱한 고민과 선택의 순간들을 거쳐오셨겠지요. 영화에서 아이들을 위해 시골로 가기로 한 하나의 선택처럼, 어머니의 선택들이 지금의 저를 자라게 한 배경이 되었고, 그곳에서 저는 스스로의 선택을 내리며 성장해갈 수 있었어요. 그래서 [늑대 아이]를 한 문장으로 하면, “한 사람의 내리사랑이 누군가가 선택을 내리는 힘이 된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