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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x flyboy chef Oct 13. 2023

The Great Generation

어려운시절을 보내고 현재를 만들어준 사람들

제가 미국서 유학생활시 친절하신 교수님덕에 뜻하지 않은,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향에 대한 큰 가르침을 주신old buddy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합니다.


미국서 만났던 연장자 분들 모두 이분들처럼 여유있고 멋진 분들만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인들이 말하는 the great generation 이라 정의하는 세대는, 경제대공황을 어린시절에 겪고, WW2라는 인류 최대의 시련을 직접 참가해서 젊음과 목숨을 바쳐서 악과싸우고 지금의 풍요로움을 열심히 자신들 손으로 이뤄낸 분들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기본적인 사고방식 조차도 기준이 아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제 영감 버디 No1은 전형적인 노던 캘리포니아 출신의 터프한척 강하면서 상당히 섬세한 양반으로 아일랜드 조상을가진 아이리쉬 캐톨릭의 스테레오타입인 집안에서, 자고로 의사나 성직자하나는 있어야한다 같은 가풍으로 키워진 사람이었지요, 본인도 초등학교때 어렴풋이 성직자가 될수도 있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다가 중학교때 평생 GF만나시는 바람에 위에게시는 Big guy하고의 약속을 깨시고 동생한테 약속을 넘겨버리셨다네요.


샌프란 외곽에 의사집 첫째 아들로 태어나서 남동생 둘과 막내여동생 4남매셨다고, 본인이 그래서 애들을 좀 다룰줄 아신다고 자부하셨죠.


바로 밑에동생이 집안에서 원하는걸 한큐에 해결해준 덕분에 본인 책임이 가벼워 졌다고.


동생분이 샌프란 베이 에어리어 캐톨릭계 종합병원 주임신부겸 외과 과장이었던 ㅎㄷㄷ한 분이었지요, 한가지 하기도 겁내 힘든데ᆢ


버디 No1은 대학1학년 첫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진주만이 기습받았고 그당시 개인 조종사 면허증을 자비로 따고있는 와중이라 뒤도 안돌아보고 육군항공대(미공군의 전신)에 자원 입대를 했다고 하더군요.


본인 아버지도 1차대전 참전용사시라 아들이 전쟁에 지원하는거 당연하게 생각하셨고 (걱정은 많이 하셨다고는 하더라고요, 본인도 프랑스의 참호에서 겪으신게 있으셔서ᆢ) 동생들도 전부 자랑스러워 했다고 하더군요.


지원후 거의 2년넘게 간부,조종후보생으로 교육받고 44년 9월말에 이태리에있는 전투비행단에 배치됐고 거기서 첫 신참조종사로 참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곳에 배치됐을때 우리비행대 CO(commanding officer지휘관)가 한국사람 이었는데 제리(독일군을 부르는말) 비행기 7대인가 8대 격추시킨 무시무시한 슈퍼맨같은 사람이었지, 그게 내 첫 한국인과의 경험이었어' 라고 하셔서 저는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하도 의아해해서 물어보니 오하이오인가 오레곤어디 출신의 구한말에 한국서 이민온 사람들의 후예로, 만나기전에 버디No1도 자기 부대 CO 이름이 서류상 Ohr로 되어있어서 독일계 미국인인가 싶었답니다, 신고하러 CO 사무실 들어갔다 미공군 소령계급장을단 자신보다 더 어려보이는 인상좋은 동양인이 앉아있어서 진짜 깜놀했다고.


그분은 일찌감치 군생활을 시작해서 자신이 배치받았을때는 말년으로, 10월 본토로 돌아가서 제대하는 케이스였답니다, 그런데도 버디No1이 비행대 막내라고 자기 wing man(편대보조)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전투초계 훈련, 지상공격훈련, 가벼운실전등을 경험시키고 귀국 비행기 타는날까지 자기델구 굳이 안해도 되는 전투비행했던 엄청난 사람이었다고 하더군요, 자기 부하 조종사들 살려서 귀국시키는게 자기의 제일 중요한 임무라고 했다네요.


자신의 일생에서 큰 지표를 보여준 아버지 이외의 첫 멘토였다고 하더군요, 솔선수범과 프론트 리딩 리더쉽이 엄청난 분이었다고.


암튼 그분덕분에 잘 훈련받고 경험도 잘 축척한뒤 몇달이 지나고 크리스마스 전후로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곳에 조종사들이 부족해서 지원해서 가셨다고, 그후에 얘기는 먼저쓴곳에있고, 종전후 47년까지 비행임무를 수행하다 동서로 나뉜 서독에서 근무하고 예편해서 본토로 돌아왔는데 그당시 독일상공서 몇번을 소련(러시아)전투기들과 조우하는 아찔한 경험이 있었다고, 같은 동맹군이라는 것들이지만 머지않아 저놈들하고 분명히 한판 붙을거 같은 생각이 계속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말이씨가 된다고 4년뒤 공군 대위로 김포에서 매일 그 러시아가 훈련시킨 중,북한 때때로는 러시아인이 분명한듯 보이는 조종사들과 압록강변 까지 날아가서 목숨걸고 싸우게될지 그때는 몰랐던거 였다고 하셨죠.


독일에서 돌아온뒤 샌프란시스코만 건너편에 다니던 대학교에 다시 복학을하고 졸업하던 바로 그해 그달에 한국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호외로 막 나오던게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고 하셨네요, 막 공군납품 무기관련 업체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려고 하는데 웬지 찜찜한 기분이 이루 말할수 없었다고ᆢ


그해 겨울 찜찜한 예감은 정확히 적중해서 회사에 들어간지 6개월도 안된 51년 1월에 현역으로 다시 동원되고 일본에서 현지 적응훈련뒤 김포로 이동해서 1년6개월간 정말 목숨을건 싸움을 지속했다고, 압록강변서 선후배, 동료 여러명이 사라졌고, 가까운 친구들을 잃었고, 상대편도 마찬가지 였을거라고ᆢ몇차려 그때까지 기억에 남는 전투들이 있어서 얘기해 주셨는데 여기에 쓰기는 좀 그렇고, 암튼 52년 연말에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다니던 회사에 복직하고 그회사의 제품개발담당 부사장으로 은퇴할때까지 계셨다고(중간에 66년 예비역 말년 대령이던 시절 다시 현역으로 동원되서 타이랜드 공군기지로부터 남북 베트남으로 10여차례 전투비행임무기간 9개월 빼고) 하더군요.


이런 엄청난 경력을 가진분이었지만 겸손하기 이를데가 없었고, 특히 다니다가도 길가에 누군가 차가 퍼져서 세워놓고 있기라도 하고있으면 언제나 도와줄일 없냐? 전화 걸어주겠다, 가까운 정비소에 태워준다 등등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절대로 지나치는일이 없었던 분이었죠, 본인 3남매 자식들이 전부 성인이된 이후에는 은퇴전부터 잘 알고지냈던 단골 한인세탁소 주인부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겨서 본인 중딩때부터 붙어지낸 평생여친(언제나 my girl friend for life라고 얘기하시던 부인을, 저만난 시점에는 암으로 돌아가신지 10주기가 얼마안됐다고ᆢ)한테 그집 남매를 우리가 데려오는게 어떠냐고 해서 부인과 같이 4년(그중 1년은 암치료ᆢㅜㅜ), 혼자 3년을 대학들어갈때 까지 키우셨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그런결정을 내렸냐고 여쭤 봤더니, 남매가 하나는 미국 동부 친척집으로, 하나는 한국의 외가집으로 떨어져 살게된다는걸 듣고는 그냥 모른척 있을수가 없었답니다. 일단 본인 아이들은 전부 자기 앞가름들은 하니(첫째아들은 국경없는 의사회서 일하는 의사, 둘째는 딸인데 그당시 공군 수송기 조종사 대위, 막내는 서품받은 신부님) 자신이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고(그당시 공군연금+회사연봉...높은6자리 수입ㅎㄷㄷ) 분명 이 두아이들의 인생에서 정말 뜻있는 일을 해볼수있고 도움을 줄수있다고 생각해서 GF한테 얘기했더니 너무 멋진 생각이라고 그아이들과 친척들을 설득해보자고 하셨다네요, 와이프는 못만나 뵀지만 그뒤 에피소드 몇가지 듣는것 만으로도 버디No1보다 더 엄청난 분이었던듯 싶더군요.


그 두 한인 남매를 대학까지 보내시고, 본인 인생최고의 럭셔리라고 살짝 쑥스러워 하시면서 계시는 콘도식 양로원을 얘기하시더군요, 이곳에서 돌아가실때까지 GF랑 그 좋아하는 뜨게질이랑 책읽기, 골프나 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자기 혼자만 남겨두고 주님한테 도망갔다고ᆢ그래도 좋은일을 하면 좋은 일이 많이 벌어지는것 같더라고요, 버디No1의 자식 농사를 보면 낳은자식들도 대단 하지만 이 한인 남매들도 딸은 실리콘벨리안의 유명대 법대를 나와서 CA주검찰청에 검사로, 아들은 대학 중퇴후 좀 방황하다 미해양경비대서 4년 근무하고 제대후 주립 고속도로순찰대원 으로 있었죠(그 경찰관 형덕분에 제가 몇번 재밋는 에피소드가 있었죠ㅋ) 이런양반 눈에 제 첫 여름방학은 영주권도없이 인턴쉽조차 구하기 어려울게 뻔히 보이는, 자신이 얼마든지 나서서 도움을 줄수있는 아이라 생각이 되셨는지 본인 지인들에게 20여통의 전화를 돌리시고 농담반 협박반 정도까지 하시고는 결국 상당히 큰 회사3곳의 인턴쉽 면접을 잡아 주시더군요.


저한테 레쥬메 써오라고 하시더니 읽어보시고는 '이거ᆢ도움이 좀 필요하겠는데ᆢ' 이러더니 버디No2를 급 호출하시고는 왈 캠브리지출신 전직 영문학교수의 뛰어난 재능이 필요하다고.


커버레터와 레쥬메(CV)를 1시간에 걸쳐서 버디No2가 저랑같이 쓰고, 레퍼런스에 본인들 2분의 연락처와 관계를 자세히 기제 하시고 20장 복사하라고 하셨죠.


두분이 겁내 빠른(70대 영감님들 타자솜씨에 ㅎㄷㄷ) 속도로 리코멘데이션 레터를 마구 쓰시더니 또 20장씩 복사.


그길로 오피스디#가서 대봉투 사서 우표 열라게 붙여서 일단 3곳의회사 본인지인들앞, 그회사들 HR담당자 앞, 아시는 안면있는 회사 HR 및 지인들 앞으로 신나게 붙였죠.


그뒤에 저보고 인터뷰때 입고갈 양복은 있냐고 그러시더군요, 저야 서울서 가져온다크 블루블레이져, 밝은 회색아래위 싱글이 있어서 그거 입으면 된다고 했더니, 가져오라고 하셔서 보시더니 버디 No1은 뭐 괜찮네 그러시는데 대서양넘어 섬나라 중상류층 출신 버디No2는 '흐으음~~' 이러시면서 영ᆢ좀 본인 맘에 안드시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시더라고요.


'적어도 교육받은 신사는 상황에 맞는 옷을입어야 하는데ᆢ특히 만나는 사람이 봤을때 너무 과하지 않고 세련되게 입는게 중요하지' '첫번째 임프레션이 특히 중요해, 지금 네가 가지고있는 수트들은 임프레시브한 첫 인상을 주기는 좀 문제가 있네ᆢ' 라고 했던듯 싶어요, 그랬더니 버디No1이 '반팔셔츠에 타이 맨다고 구박받았던 입장이라 난 거기에 할말은 없지만 교수양반 지적에 일리는 있긴하네ᆢ' 하더라고요.


이 두양반 대화를 들으면 정말 배꼽잡는게 두분다 나름 만만치 않은 분들인데 서로 모르거나 약한부분이 있으면 있으면 서로 부르는 방법도 틀려지더라고요ㅋㅋ 버디No1이 뭔가 궁금하거나 의견을 물어보려고 하면 Dr.**** 아니면 프로페서****라고 주로하고 뭔가 딴생각 하시거나 평소에는 그냥 퍼스트네임 짧게 하는 ## 아니면 뭔가 맘에 안드는 소리를 하면 '어이 대위'(본인이 대령이시라ᆢ)로 바뀌더라고요. 버디No2도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퍼스트네임 베이스로 ## 아니면 dear old boy로 부르는데 뭔가 마음에 안들면 '대령!!'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버디No2가 뭔가 부탁할일이 생기면 Dr. ***라고 부르시더라는ㅋ 버디No1도 항공공학 박사학위가 있으셨긴 했죠. 하시는 말씀이 돈받고 강의실서 누구 가르친적은 없으셨다고, 비행기타고 상대방 하늘에서 떨어트리는거 가르친거 빼고는요.


암튼 그 얘기를 나누다가 근방에 있는 아웃렛으로 인터뷰용 양복을 사러 갔는데 정말 영국인들의 양복입는 방법을 지대로 배웠지요ᆢ 바지길이와 구두의 상관관계, 양복쟈켓팔소매 길이와 셔츠커프스의 길이의 관계, 넥타이와 벨트, 구두 색상, 행커치프 사용과 보관방법 등등 정말 뭐 모르는 촌놈이 영국인 교수님의 손에서 환골탈퇴를 했네요.


그로부터 약 1주일뒤 5군데에서 인터뷰 요청이 더 와서 총 8군데중 첫 3군데+3군데를 더 보고 제일 조건이 좋은곳에서 3달간 인턴쉽을 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저랑 같이 이 활동을했던 친구들도 상당히 나쁘지않은 곳에서 섬머인턴을 했더군요, 두 미해군,해병 예비역들이야 영감님들 도움이 굳이 필요없었겠지만 일본친구와 한인교포친구는 자신들이 만났던 영감님들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미국서 완전 짜증나는 꼰대 영감님들도 만난적이 있었고 뭐이런 것들이 있지? 싶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분들 만큼 '우와~~'소리날만큼 멋진 양반들을 많이 만나보지도 못했지 싶긴합니다.


요즘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와중에 이글을 쓰면서 이 멋진 분들의 레거시를 나도 누군가에게 전달해주고 싶긴한데ᆢ 오지랍이고 어린친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제가 오히려 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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