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 시장에서는 중대한 혁명이 진행 중이다. 2020년대 들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는 전 세계 130여 개국에서 개발 중이거나 실험 단계에 접어들었다. 언뜻 보면 이는 단지 현금을 디지털로 바꾸는 기술적 진보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CBDC가 가져올 진짜 변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철학과 덕목을 시민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디지털 통치의 가능성에 있다.
CBDC는 디지털 화폐를 넘어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 즉 사용 목적, 시간, 장소, 수령자 등에 따라 그 기능이 제어될 수 있는 화폐다. 기존의 현금이 모든 이에게 동일한 가치와 자유를 보장했다면, CBDC는 조건에 따라 사용을 제한하거나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는 재난지원금, 유효기간이 설정된 복지 예산, 탄소 배출량 제한에 연동된 소비 제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행동을 설계하는 화폐'가 될 수 있다. 이는 곧 화폐가 교환 수단일뿐 아니라, 국가의 윤리와 미덕을 구체화하는 프로토콜로 작동한다는 의미다.
문명국가는 흔히 근대 서구에서 형성된 보편적 자유주의 국가와 구별되는 개념이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문명국가는 각기 고유한 역사적·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을 국가 운영 원리로 삼고, 이를 국민들의 일상적 행동 규범으로 요구한다. CBDC는 이러한 문명국가의 철학적 이념을 디지털 코드로 치환하여 개별 시민의 일상적 행동을 직접 규율하는 새로운 통치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는 이미 사회신용 시스템과의 결합을 통해 사회적 순응을 유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신용점수가 낮은 사람은 고속철도 이용이 제한되거나 대출 금리가 상승하는 식으로 불이익을 받는다. 디지털 위안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중국 정부는 시민 개개인의 소비 내역과 이동 경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여 국가가 원하는 형태의 ‘바람직한 시민’을 코드화하여 유도할 수 있게 된다.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CBDC를 통해 율법의 준수를 경제적 인센티브와 연결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예배 참여율이나 이슬람 의무 자선인 자카트를 디지털 화폐로 납부하면 금융 서비스에서 혜택을 제공받는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러시아 역시 디지털 루블을 통해 정치적 성향이나 국가 충성도를 디지털 금융 활동과 연결할 가능성이 있다. 서구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CBDC 도입 논의가 활발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러한 통제형 설계에 신중한 입장이다. 그러나 공공보건, 기후 변화 대응, 테러 방지 등 공익적 목적을 위한 CBDC의 제한적 사용 가능성을 서서히 열어두고 있어 향후 변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미국은 중앙집권적 CBDC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민간 주도의 스테이블코인 시스템을 통해 디지털 화폐 체제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중앙은행이 개인의 지갑과 거래를 통제하는 CBDC를 반대하며, 민간 기업이 발행한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 달러의 자유주의적 대안’으로 육성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World Liberty Financial)에서 발행한 USD1 스테이블코인이다. USD1은 미국 국채를 담보로 하여 1:1로 달러에 연동되며, 아부다비 등 해외 금융자본의 지지를 얻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전략은 통화 발행 권한을 민간에게 분산시키는 동시에, 글로벌 결제 수단으로서의 달러 헤게모니를 디지털 시대에도 유지하려는 시도다. 이는 중국을 위시한 CBDC 중심의 ‘통제형 디지털 질서’와 대조된다. 디지털 화폐를 둘러싼 문명국가 대 자유주의 국가 간의 철학적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CBDC는 미덕과 질서를 코딩하고, 스테이블코인은 선택과 유연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국내에서는 CBDC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늘 동전의 양면을 두루 살펴야 한다. CBDC를 통제와 감시의 수단으로만 보아선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오히려 실현 가능한 긍정적 미래상도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제공되는 복지금이 알코올, 도박 등 중독성 소비에 사용되지 않도록 설계함으로써 복지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탄소중립 사회를 지향하며 저탄소 소비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건강한 식생활을 유도하는 소비패턴에 따라 혜택을 제공하는 구조도 구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전통 공동체의 문화적 관행을 장려하거나, 지역 기반 소비를 촉진하는 등 공동체 윤리를 디지털 화폐에 반영할 수 있는 가능성도 크게 열려 있다. 이런 점에서 CBDC는 각 국가와 문명이 추구하는 이념을 행동 코드로 변환하는 디지털 예법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이는 곧 화폐의 본질이 바뀌는 역사적 전환이다. 미국조차 새로운 디지털 로마 제국을 건설하려는 듯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지금, 앞으로 공화국의 시민은 제국의 신민이며, 동시에 하나의 믿음을 따르는 종교적 신도가 되어갈 것이다. 우리는 문명 전환의 문턱에 서 있다. 이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어떤 가치와 전통에서 미래의 단서를 발견해야 할까?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인 문명사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상을 디지털 화폐의 시스템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해야 할까?
화폐는 늘 시대정신의 거울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화폐가 ‘윤리와 철학의 표현’이라면, 우리는 그 코드를 설계하기에 앞서, 먼저 사상을 성찰해야 한다. 디지털 문명국가 실험이 본격화되는 지금, 인류는 세계관의 재구성을 요구받고 있다.